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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그날

68. 인연 20210628

by 지금은

삶은 관계라고 하는데 나는 다른 사람과의 연을 잘 맺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별일이 아니어도 잘 어울리더구먼.’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나 함께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보면 가끔 발견합니다. 특히 경로석의 나이 든 여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나는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말재주가 없고 친근감도 부족합니다. 형제나 친척들의 모임에서도 늘 처음 만나는 사람 대하듯 합니다. 아내와 아들과의 대화도 많지 않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루에 말을 몇 마디나 하고 사는 거야. 부부 사이는 원활한지.”


나는 ‘씩’ 웃고 맙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 사이의 관계는 이상이 없습니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내를 옆에 두고도 오전 내내 상대가 없는 것처럼 말이 없었습니다. 남이 눈여겨보기라도 한다면 꼭 싸운 줄로 착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잠시 옆방으로 옮겨간 후 읽던 책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입이 붙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묵독에서 낭독으로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천천히 이방 저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글자를 읽어갑니다.


“나 불렀어요?”


아내가 서재에서 글씨를 쓰다 말고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니, 책을 읽는 중인데.”


아내가 얼굴을 감추었습니다. 그 후로 큰 소리로 여남은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에 한 번 낯 모르는 사람들과 주고받던 이야기도 끝났습니다. 두 시간 정도는 오로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공통 관심사를 모아갔습니다. 부담은 됐지만 막상 끝나고 나니 수강 기간이 좀 더 연장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며칠 전에 도서관 주체 ‘그림책 이야기’의 강사와 수강생들이 종강의 기념으로 대면 모임이 있었습니다. 보름 전에 추진했는데 비가 자주 내리다 보니 날짜를 미루고 미루다 어렵게 성사되었습니다.


그림책 이야기 수강생들은 대부분 사오십 대의 여성입니다. 출발부터 끝나는 날까지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서로 만나는 일 없이 화상교육으로 일관했습니다. 강사는 쌍방향 소통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수업 시간에는 자신의 일방적인 말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한 주제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끌어내고 토의합니다. 처음에는 나를 들어낸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수업이 진행될수록 수업의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습니다. 개중에는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싫어서인지 수강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과 견주어 보아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짐작합니다.


숙제처럼 부담감은 있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았어도 소통하는 가운데 서로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나이를 밝히며 언니, 동생의 서열도 정해졌습니다. 나이가 많은 이유로 나만 열외였습니다. 마땅한 호칭이 떠오르지 않아서인지 그냥 ‘선생님’으로 불렸습니다.


모임 날짜를 앞두고 그들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기다려지네요.”


“가까운 곳에 모여 사니 금방 이웃사촌이 되겠어요.”


나는 망설여집니다. 만나야 할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 끝에 전날 잠자리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만두어야지.’


나는 이 나이가 되기까지도 수줍음이 많습니다. 그들과는 비교될 수 없도록 나이가 많습니다. 따진다면 딸과 아버지 정도의 차이입니다. 청일점, 남자입니다. 모임에 참가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하나씩 나열됩니다. ‘그림책 이야기’의 수업이 마음에 와닿으면서도 모임 자체에 대해 망설여집니다. 결국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SNS의 화면을 통해서 그들의 모임과 분위기를 관찰했습니다.


같은 연배여서인지 사진을 통한 활동 모습을 보니 통하는 데가 있다고 하는 느낌이 다가옵니다. 생각 같아서야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염려되는 것은 분위기입니다. 나로 인해 어색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입니다. 낄 자리 안 낄 자리 가리지 않고 덤볐다가는 자칫 푼수 소리를 듣지는 않을지.


모임이 유익하고 즐거웠나 봅니다. 그날 저녁부터 맥주파티를 하자는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오늘같이 다례원에서 차를 마시고 공원을 산책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다음 모임에 대한 찬반입니다. 내가 그들만큼 젊었더라면 실현 불가능한 생각을 떠올립니다.


책을 펼칩니다. 그동안 그림책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마다 후기를 남겼는데 책으로 엮여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정보 교환을 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눈이 서서히 그들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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