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1

70. 저것도 책 20210702.

by 지금은

세상은 인구가 늘어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들로 넘쳐납니다. 물질문명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새로운 것들을 계속 탄생시킵니다. 나는 그중에서 책을 말하려고 합니다. 글자가 생겨나고 종이와 활자가 발명된 이래 책들이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문맹률이 줄어들면서 늘어나는 속도는 자동차가 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라졌습니다.


나는 도서관 이용을 즐깁니다.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


내 소지품을 챙기듯 종종 도서관에 들러 책들을 안고 집으로 향합니다. 물론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끌어안기도 합니다. 사오 년 전부터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도서관에 접속합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찾습니다. 깜빡 잊고 도서관에 갔을 때는 마을 골목을 서성이듯 서가를 돌며 책을 구경합니다. 이 책, 저책 눈 맞춤을 합니다. 나는 시집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짧은 글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특히 짧은 글과 그림이 혼재된 책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칩니다. 내용이 빈약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제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평소의 생각과는 달리 싫어하는 책을 손에 잡았습니다. 도서관 문을 나서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 거야.’


책장을 다시 열었습니다. 아무래도 잘못 고른 게 분명합니다. 문을 열다가 다시 멈췄습니다.


‘그래, 멍 때리는 셈 치지 뭐.’


여느 때와는 달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책을 들췄습니다. 잠시 머물렀다 싶었는데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동안에 비둘기가 발밑을 지나가고 까치가 와서 기웃거렸습니다. 약삭빠른 참새도 옆에 와서 초싹거리다 별 볼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가벼운 날갯짓을 여유 있게 남기고 떠났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가 내 앞으로 다가와 꼬리를 내두릅니다.


“아니야, 할아버지가 앉아계시잖니.”


함께 온 젊은 여인네가 강아지를 제지하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내가 책을 보는 사이에 목석이 되었나 봅니다. 비둘기가, 까치가, 참새가 거리낌 없이 내 주위에 머물렀으니 말입니다. 강아지도 잠시 그랬습니다. 강아지야 뭐 길든 반려견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의심 많은 참새까지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도시의 새라서 그럴까요.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개들이 내 앞에 다가왔을 때야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원을 한 바퀴 돌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느새 책을 한 권 다 읽었습니다. 내가 옆에 있는 솔밭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되돌아보니 어느새 주인과 개 두 마리는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 모습도 글이 될 수 있겠다.’


방금 읽은 책 속의 내용을 떠올립니다. 사진이나 그림 한 컷이 한 페이지 차지하고 활자 몇 개가 지면을 성글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림책이라고 하기에는 뭣하고 딱히 무슨 책이라고 말하기가 어색합니다. 제목은 「못한 말」이라는데 할 말 못 할 말 뭐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못한 말보다 넋두리의 말이라면 아니 뭐 그저…….


나는 책을 읽으며 틈틈이 글을 쓰다 보니 몇 해 전부터 책을 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퇴직 후 처음에는 그저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책을 읽겠다고 했습니다. 꾸준히 독서한 덕분일까요. 어느 날 나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보다 손이 먼저 펜을 들었습니다. 모이고 모인 글들은 책으로 묶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반딧불처럼 순간순간 머릿속을 채웠습니다.


내 글이 책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다른 공간을 차지했습니다. 정식으로 내 글을 남에게 평가받아 본 일은 없습니다. 내가 쓰고 내가 읽는 가운데 자아도취에 이르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언젠가 책을 읽다 보니 지신의 글에 도취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냉정해지라는 말입니다. 내가 남의 글을 보듯 평가의 기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쉽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검정을 받아보고 싶어서 가끔 문학지나 문학작품 응모대회에 원고를 보내기도 합니다. 몇 차례 좋은 결과를 얻기는 했지만 내 작품을 전체적으로 평가받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쳐 주르르 뒷장까지 훑어봅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마음속에 남는 것은 없지만 이런 것도 책이 될 수 있겠다고 하는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시보다도 더 간단한 내용, 밑도 끝도 없는 말, 이파리만 있는 글자. 달랑 뿌리 한 줄기만 땅 밖으로 솟아난 숫자. 다음을 이어가는 내용은 그림에 있고 아니면 흰 여백에 있는지 모릅니다.


집에 가면 작가의 마음을 읽고 의도하는 바를 조심스레 유추해 봐야겠습니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듯이 책도 이름이 있으니 업신여기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사람마다 그 특징이 있는 것처럼 책도 그 쓰임이나 특징이 있겠다고 생각하렵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하나의 인간입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느냐 남지 않느냐 그 차이일 뿐입니다.


희망을 품어 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 그러고 보니 나쁜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둔 원고를 다시 펼쳐야겠습니다. 작가들의 말처럼 내 글을 읽고 퇴고를 거듭해야겠습니다.


주르륵 다시 한번 책장을 빠르게 넘깁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