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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그날

54. 인생은 길다. 20210722

by 지금은 Dec 02. 2024

오월이 끝나갈 즈음입니다. 서울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서체에 관심이 있기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인천의 끝에 살고 있으니, 서울에 볼일이 있으면 하루를 잡아야 합니다. 왕복시간과 머무는 시간을 따지면 하루해가 걸립니다. 다른 계획이 있으면 다음 날로 미루는 게 마음 편합니다.


그동안 서예 전시회 하면 한글과 한문, 서각이 공간을 차지했습니다. 이번에는 캘리그래피라는 글씨가 추가되었습니다. 전시회 공간이 넓고 출품작이 많습니다. 서체 또한 다양합니다. 이것들을 세세히 살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올해는 이틀이나 같은 걸음걸이를 했습니다. 작품이 많기도 하려니와 마음에 드는 글귀나 서체 앞에서는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잠시 서예에 몰두한 시기가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지나면 나머지는 글씨 쓰기에 마음과 손을 할애했습니다. 한글 궁체의 매력에 빠지다 보니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무작정 홀로 붓을 들었습니다. 쓰는 만큼 실력이 늘었지만 남 앞에 선을 보일 정도의 실력이 못됩니다. 이때 지도자의 도움이 없이는 발전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기에 서서히 붓을 드는 횟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지 화선지를 펼치지는 않지만, 전시회에는 꾸준히 얼굴을 내밉니다.


나는 박물관이나 전시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미리 알아서 잘 찾아가기도 하지만 길을 가다가도 눈에 뜨이면 무조건 들어가 봅니다. 대규모 전시회도 좋지만, 작은 규모의 개인 전시회도 좋습니다. 의외의 볼거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작은 화랑에 들렀는데 ‘하늘’이라는 작품들이 벽을 메웠습니다. 오로지 하늘의 그림뿐입니다. 한가한 시간이라서 작가와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가끔 하늘을 보고 감탄하는 일이 있는데 이날은 생애에 느낀 감탄사를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았습니다.


소규모의 전시회, 만만히 볼 게 아닙니다. 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시화전에도 가보았습니다. 문해 교육생의 작품입니다. 생활고로 인해 교육 기회를  놓쳤던 사람들이 늦게나마 학업의 장으로 입문하여 갈고닦은 실력을 펼쳤습니다. 보통 육칠십 대의 사람들입니다. 팔십을 넘긴 분도 있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문가의 수준은 아니지만 시화 속에는 진솔한 삶이 들어있습니다. 그 나이에도 소년과 소녀의 순수함이 배어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원의 한 곁에서 그림에 열중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일곱 명의 사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여 있습니다. 수채화 도구들이 펼쳐있습니다. 풍경을 화폭에 담는 중입니다. 그들은 내가 뒤로 다가서는 것도 모르고 붓놀림에 바쁩니다. 나는 서서히 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화폭을 보고 앞에 보이는 풍경을 봅니다. 같은 풍경임에도 화폭에 담는 것은 제각기 다릅니다. 그림과 사진의 차이입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건질 게 있습니다. 오늘도 보람이 있습니다.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닮고 싶습니다. 이럴 때면 손이 열 개쯤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깊이보다 넓이에 관심이 더 큰가 봅니다. 평소에는 깊이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그게 아니었을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어찌 되었든 인생도 깁니다. 백 년 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모를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몇백 살을 산 사람도 있고 전설에 의하면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 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예전에 비해 인간의 수명이 대폭 늘어난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긴 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목석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삶을 무엇인가로 메워야 합니다. 그동안 습득한 것을 잘 이용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합니다.


땅거미가 짙어진 후에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수채화를 그려야 할까? 그렇습니다. 글을 써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고 공간을 메워야 합니다. 습관이 필요하다.


“여보, 저녁 식사해요.”


컴퓨터는 끄지 말아야지, 껐다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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