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은 Dec 19. 2024

☏2021

13. 가을 냄새 20210905

기온이 점차 낮아지니 새벽에는 얇은 이불을 덮어야 합니다. 창문을 열면 멀리서도 가을 냄새가 달려옵니다. 여름 내내 몸을 숨기더니 우리 집 창문을 향해 서울의 북한산이 슬며시 정수리를 내밀었습니다. 날씨가 쾌청하고 공기가 맑다는 신호입니다. 며칠 사이에 이른 아침의 풍경이 선명해졌습니다. ‘와아’ 창문을 열며 다가오는 풍경에 대한 감탄사입니다. 새벽노을에 물드는 하늘과 산은 그림입니다.


밖에 나갔던 아내가 가을을 한 아름 안고 왔습니다. 고춧잎, 대파, 호박, 풋콩이 터질 듯 큰 비닐봉지에 담겼습니다. 현관에서 짐을 받았습니다. 가을을 나타내는 붉은 고추 몇 개도 비닐봉지의 무늬처럼 겉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내의 입에 미소가 넘칩니다. 옷을 갈아입을 사이도 없이 내용물들을 식탁에 펼칩니다.


“가을을 만져 봐요.”


아내는 서예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는 사람의 개인 전시입니다. 코로나로 전염병 확산으로 인해 만남이 없었는데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두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어제 나와 함께 작품을 구경했지만, 주인공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생각해서 알렸는데 서운해할 것 같다며 가까우니 잠시 갔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주인공은 오랜만의 만남에 기뻤나 봅니다. 친지에게 전시장을 맡기고 자신의 텃밭으로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두가 싱싱하지요.”


도시에서만 살았던 아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자신도 조그만 텃밭을 가꾸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기에 전에 말했지, 시골에 가서 살자고.”


“그건 아니고요.”


정년을 앞두고 몇 번이나 시골살이를 말했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신조입니다. 힘이 달리는데 시장이 가까워야 한답니다. 건강이 점차 나빠질 테니 병원이 가까워야 한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는 가끔 시골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이라면 시골에서 반, 도시에서 반 정도를 살아보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정서나 교육적인 면으로도 좋습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어도 이 환경 저 환경을 대하다 보면 스스로 습득하는 지식이 많아집니다. 이런 면에서 나는 될 수만 있다면 산촌, 농촌, 어촌, 도시에서 삶을 체험할 것을 권합니다.


아내는 옛날의 시골 음식을 좋아합니다. 텔레비전에서 ‘고향밥상’ 프로그램이 나오면 시선이 집중됩니다.


“나 저런 음식을 좋아하는데.”


“시골에 가서 살까.”


소득이 없는 줄은 알지만, 은근히 떠봅니다. 눈은 화면을 떠날 줄을 모릅니다.


“그게 아니고요.”


젊은 시절 우리는 등산을 많이 했습니다. 이름이 있는 높은 곳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만한 가까운 근교의 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 산나물을 조금씩 뜯어보고 나무 열매의 맛도 보았습니다. 집으로 오는 중에 채소를 사 오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호박잎과 깻잎을 많이 먹었습니다. 한 봉투 눌러 담아도 몇 푼 되지 않습니다. 그 양에 아내는 만족입니다. 애호박, 풋콩, 상추, 토란 대, 취나물, 냉이, 도라지……. 덕분에 채소나 나물의 이름을 알게 되고, 나무의 이름도 서서히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아내가 제일 먼저 기억하는 것은 쑥입니다. 아내의 기억력이 사라진다고 해도 쑥이란 말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나와도 쑥 나왔다고 하는 게 뭐지.”


사실 아내가 나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쑥이란 식물도 알지 못했습니다. 쑥떡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실물을 보여주며 설명하자 알게 되었습니다. 쑥의 좋은 점이 있습니다. 주인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흔한 식물입니다. 몇 년 동안 봄이면 쑥을 부지런히 뜯었습니다. 양이 많아 때로는 이웃과도 나누었습니다. 쑥떡, 쑥버무리, 도다리쑥국, 부침을 골고루 먹었습니다.


식탁 위에 펼쳐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다듬다 보니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언니, 더 필요하지 않아요. 바빠서 조금밖에 주지 못했네.”


“대만족.”


“다음에는 고구마도 있는데.”


이를 어쩌지요, 우리는 아직 가을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가을 하늘을 스마트 폰에 부지런히 담는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