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늦게 피는 꽃 20211216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어젯밤에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 드라마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자막을 보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생뚱맞은 생각이 듭니다. 무슨 8월에 크리스마스. 8월에 눈을 맞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어울리지 않은 자막입니다. 노르웨이를 여행하던 중 피오르드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겨울의 눈 폭풍처럼 산 정상에서 눈바람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습니다. 첫눈치고는 너무 일찍 맞이했습니다. 어찌나 억세게 달려드는지 우산으로 성깔을 당해낼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차 안으로 쫓겨 들어가 잠시 머물러야 했습니다.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내용을 모릅니다.
‘12월의 장미’ 이 또한 어울리는 모습인가. 6월의 장미라고 하며 모를까.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 우연히 장미 한 송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만큼 지나치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발길을 되돌렸습니다. 모두 가지마다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데 유독 한 가지만 장미가 봉오리를 맺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이면 봉오리를 터뜨릴 게 분명합니다. 함께 석양의 노을을 받으며 눈인사를 교환했습니다.
“늦된 곡식이 옹골차거든.”
어렸을 때 동네의 어느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끝까지 살아봐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제도가 있습니다. 최고령 합격자는 90세입니다. 고종 때, 김재봉이라는 분입니다. 그 끈기를 알아줄 만합니다. 요즈음도 80이 넘어서 학문에 발을 들여놓는 이가 있습니다.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이도 있습니다. 도전을 본받을 만합니다.
첫눈이 내린 지는 이십여 일이 지났어도 장미의 봉우리는 홀로 예쁩니다. 몽우리가 작기는 하지만 주위에서 견줄만한 상대가 없습니다. 스마트 폰을 얼굴 가까이 내밀었습니다. 6월이라면 어땠을까. 그 많은 장미 틈에서 내 눈에 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아니 안중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10여 분 가까이 눈을 마주하고 마음을 나누는 중입니다. 기온이 내려가 옷깃을 여며야 하는 시기이기에 조금은 가련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꿋꿋이 제 몫을 이루려는 기상이 마음에 듭니다. 재주가 부족하고 능력이 없다고 일찍 포기하기보다는 끝까지 해보려는 의지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성격상 카메라에 한 번 담으면 족할 것을 방향과 거리를 달리하며 다섯 차례나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노을을 마주한 장미는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빛이 장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기다리며 조금만 더, 더하고 화면을 조정하는 사이에 해는 노을을 끌어안은 채 수평선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늘만 날인가 뭐’
석양은 어둠을 끌어안으며 내일을 기약합니다.
궁금해서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를 찾아보았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