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전 4학년을 담임했던 때입니다.
‘글자를 모르다니.’
햇병아리 교사로 처음 부임한 시골의 학교에서도 1학년 신입생을 제외하고 책을 읽지 못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1학년 입학생이라고 해도 한글을 깨치지 못하고 입학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너는 참 재수가 없는 아이로구나.’
학생을 방과 후에 교실에 남도록 했습니다. 걱정이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한글을 꼭 깨쳐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시켜보니 한글을 깨치기에는 별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서로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두려워하는 빛은 보였지만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가정형편을 물어보았습니다. 젊은 부모가 있고 여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생계가 어렵다 보니 부부가 맞벌이해야 합니다. 새벽 일찍 나가고 밤늦게 귀가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보살핌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삼 년 동안 담임을 잘못 만난 때문입니다. 이 아이에 대해 관심이 있는 선생이라면 분명 한글을 깨쳐 주었을 것입니다.
“너 내일부터는 나머지 공부해야겠다.”
이 아이는 담임을 잘 만났습니다. 옆에 반들은 사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오후반으로 갈려 등교합니다. 하루의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방과 후 나머지 공부를 시키고 싶어도 장소가 문제입니다. 하기야 부족한 부분을 돌봐줄 마음만 있다면 어느 구석이든 이용할 공간을 찾을 수 있겠으나, 열성의 문제입니다.
우리 반은 교실 하나를 두고 오전 오후로 나뉘지 않고 전일 수업을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학교의 도서실 업무를 담당해서입니다. 모두 꺼리는 업무이고 보니 내가 선뜻 나서자, 특혜 아닌 특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실은 도서실 겸용 공간으로 책들이 벽면을 모두 가렸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책을 읽고 싶은 아이들이 우리 교실을 찾습니다. 나는 도서 관리와 계획은 물론 이들의 독서지도를 해야 합니다.
나머지 공부 첫날입니다. 진동이와 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글자를 읽어 봐.”
한글 낱자를 우선 익혀야 합니다. 음절표를 이용했습니다. 입을 떼지 않습니다. 달래고 어르기를 반복합니다.
“혼자라서 그러니?”
반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더듬거리며 읽기는 하지만 받아쓰기가 매우 부족한 아이를 남도록 했습니다. 경수와 진동은 친한 사이이입니다. 며칠 동안 잘되는가 싶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가 결석했습니다. 다음 날도 결석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가끔 결석했다고 합니다. 내일은 오겠지 했는데 또 결석했습니다. 동네 아이를 데리고 가정방문을 했습니다. 집은 공동묘지 바로 인접한 곳입니다. 인접한 곳이라기보다는 묘지와 묘지 사이에 쓰러져 가는 움막이나 별 다름없는 초라한 집입니다. 주위의 집들이 그렇게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 앞에서 함께 간 아이가 진동을 찾자, 여동생이 나왔습니다.
“집에 없어요. 아까 저 공동묘지 너머로 갔는데…….”
“내일 학교에 꼭 나오란다고 말해 줘.”
다음 날 진동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함께 학교에 왔습니다. 여태껏 글자도 모르는 놈이니 학교에 가서 뭐 하겠느냐는 아버지의 심한 말이 아이의 마음을 거슬렸답니다. 어머니는 바쁘다며 사정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며 미안한 표정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나머지 공부는 학년이 올라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서서히 아이가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게 되고 성적도 조금씩 향상되자 부모들은 용기를 얻었답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술을 끊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늘 좋을 수는 없습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한 달 후의 일입니다. 첫 수업 시간입니다.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업을 멈추고 문을 열었습니다.
“경수 어제 이빨이 부러진 것 아세요”
“무슨 말씀인지?”
“어제 나머지 공부를 하다 화장실에 가는데 진동이 발에 걸려 넘어져 앞니가…….”
“이 해봐.”
정말 앞니 하나가 없습니다.
복도 밖으로 두 아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혹시 싸움했거나 장난을 친 것인지 알아봐야겠습니다. 경수 어머니와 나는 두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말 그대로 책상 밖으로 나온 발에 걸려 넘어졌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경수의 말로는 진동이가 동화책에 빠져있었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싸웠거나 장난을 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해서요.”
눈물을 보이면서도 경수를 잘 보살펴 주셔서 고맙다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제는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비웠습니다. 출장 관계입니다. 수업 후 두 아이에게 오늘은 집으로 가라고 했지만, 책을 읽겠다고 해서 허락을 해둔 상태였습니다.
“장난치지 말고 갈 때 문 잘 잠그고 가는 거야.”
어느덧 겨울 방학이 지나고 머지않아 종업식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후의 일입니다. 진성이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조그만 곽을 내밀었습니다. 만년필입니다.
“형편이 어려우실 텐데 뭐 이런 선물을,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받으려 하지 않자, 약소해서 그러느냐며 눈물을 보입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육 학년을 마쳐도 눈뜬장님으로 남을 뻔했다며 창문의 커튼을 내립니다.
“세탁해서 개학하는 날 가지고 올게요.”
며칠 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새 만년필이 보입니다. 눈에 익습니다. 사연이 있기에 아직 사용하지 않고 고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겉모습이 처음 그대로 반짝입니다. 만년필 속에는 진성이 어머니의 수줍은 듯 기뻐하는 모습이 어립니다.
'오래돼서 사용할 수 있을까?'
잉크를 넣었습니다. 펜촉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종이 위를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