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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5. 칼바람 202117

by 지금은

바람이 매섭습니다. 어젯밤 일기 예보에 기온이 급강하한다고 했습니다. 아침 일찍 문자가 왔습니다. 바람도 심하며 돌풍이 있을 예정이니 노약자는 조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온종일 집 안에만 머물기에는 몸이 허락지 않습니다. 요즘 방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몸에 이상을 느낍니다.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쑤십니다. 머리까지 맑지 못합니다. 잠잠하던 이명도 살아났나 봅니다.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귓속이 무척이나 시끄럽습니다.


점심 식사 후 차를 한 잔 마신 다음 슬그머니 일어섰습니다.


“그렇게 나가려고요? 있는 옷 뭐 하게 두꺼운 옷을 입어요.”


두툼한 코트를 입었습니다. 몸에 자극이 옵니다. 따스함이 아니라 조금은 더운 느낌이 어깨를 감쌉니다.


아내의 말을 듣길 잘했습니다. 출입문을 열자, 냉기와 함께 바람이 얼굴로 달려듭니다. 황조롱이가 쥐를 잡아채기라도 할 것처럼 눈치를 보며 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재빨리 손이 올라가 모자를 잡았습니다. 하마터면 있던 모자를 날릴 뻔했습니다. 지난해 같았으면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거세기는 하지만 이왕 나왔으니 걸어야겠습니다. 한두 번 생각을 바꾸다 보면 마음이 나약해질지 모릅니다.


눈발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어제 날씨 예보에 강원, 경기지방에 눈발이 날릴 거라고 했습니다. 인천이라고 별다르겠습니까. 같은 중부지방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하지만 흰무리는 눈이 아닙니다. 풀씨입니다. 민들레 홀씨나 갈대, 부들, 고들빼기 등의 씨앗들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 많은 홀씨는 허허벌판의 공터, 늪지대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것입니다. 우리 고장에는 매립지가 넓은 만큼 공터도 많습니다. 스스로 자리 잡은 풀들이 이제는 삶을 마감하고 씨앗을 남깁니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나 봅니다. 바람에 홀씨들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내 목적지를 대학교의 뒤편 공원으로 정했습니다. 해안가입니다. 발길을 끊은 지 보름 정도는 됐나 봅니다. 바람이 심하겠지만 궁금한 생각에 방향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따뜻하던 앞가슴이 미지근해집니다. 장갑 낀 손이 서서히 아려옵니다. 뭐, 속도를 내면 손이 따스해질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빨리합니다. 학생들의 발걸음도 평상시에 비해 빨랐습니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승객들은 제각각입니다. 귀를 어루만지는 사람, 풀어헤친 옷을 여미는 사람,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상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 사이인가 봅니다.


학교에 다다랐을 때는 손이 아려옵니다.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호주머니에 넣지 않는데 오늘은 모르는 사이에 손이 주머니를 들락거립니다. 해안 가까이 다다르자, 바람은 더욱 매섭습니다. 교정 한 귀퉁이에 모아놓은 쓰레기들이 바람에 흩어져 있습니다. 비닐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나뭇가지에 걸쳐 기발처럼 나부낍니다. 실 끊어진 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우산 하나가 날개를 펼친 채 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산뜻한 우산입니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망가진 우산이겠지.’


몇 발짝 지나치다가 되돌아섰습니다. 말짱한 우산입니다. 접어보니 잘 접힙니다. 우산살이 망가졌나 하고 다시 펼쳐봤습니다. 날아다니느라 긁힌 자국은 있지만 새 우산이나 진배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제 홀로 몇백 미터를 굴러온 듯합니다. 우산을 머리 위로 들었습니다. 휘청하고 우산이 요동을 칩니다. 제 몸 다치지 않고 잘 굴러온 것인데 우산살이 꺾여서야 하겠습니까. 재빨리 방향을 바꾸어 살을 접었습니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부지런히 걷습니다. 해안가는 바람이 정말 심합니다. 맞바람에 몸이 휘청합니다. 이럴 때는 등을 지고 걸어야 합니다. 그 많던 갈매기들은 바람을 피했나 봅니다.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모르는 사이에 빨라집니다. 바람이 등을 사정없이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공원의 끝에 이르렀을 때 방향을 바꾸어 학교 뒤편의 언덕을 넘었습니다. 등을 마구 밀어내던 바람이 언덕에서 방향을 바꿨나 봅니다.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지는 기분입니다. 반원으로 오목하게 자리 잡은 야외 학습장은 나를 말없이 품었습니다.


잠시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습니다. 지난여름에 여기 그늘에 앉아 칼림바로 ‘즐거운 나의 집’을 연습했었는데,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악보를 더듬어 봅니다. 몇 번인가 음을 되풀이하여 음미했습니다.


‘인제 그만 가야지.’


잔뜩 찌푸린 날씨는 어둠을 서서히 몰고 옵니다. 가로등이 반짝이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큰길로 나서자 다시 바람이 나에게 달려듭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야.’


건널목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자, 한 청년이 혼잣말을 남기며 자전거의 페달을 힘차게 밟습니다.


“에이 더럽게 춥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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