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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4. 겨울의 맛 20211228

by 지금은

요 며칠 동안 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한파가 갑자기 몰아치던 날 날씨를 예보하는 예보관은 40년 만에 추위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그동안 겪은 추위는 이보다 더 한 날이 많았습니다. 어제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듯해도 오늘도 추위는 선 듯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종일 잿빛 하늘이고 보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냥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해가 났으면 했지만, 밖은 계속 흐리기만 합니다.


괜히 마음이 우울합니다. 책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기타를 손에 들었지만, 음은 자꾸만 자리를 이탈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바깥을 한 바퀴 휑하니 돌아야겠습니다. 이리저리 두서없이 걷다 보면 우울한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발길은 그동안 익숙하지 않은 곳을 택했습니다. 찻길을 건너자, 호수로 향했습니다. 춥기는 추운 날씨입니다. 호수가 고기의 배처럼 허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강추위에는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얼음이 호수의 물을 감싸려는 게 분명합니다. 두꺼운 얼음 조각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밤새 서로 싸웠나 봅니다. 날카로운 얼음덩이들이 조용히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왕 얼 거라면 더 두꺼워야 합니다. 왜 더 두꺼워야 하는지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갑자기 내 뒤로 소음이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보트가 얼음을 밀치며 내 뒤를 따라오는가 했는데 거리를 두고 옆을 지나칩니다.


‘쇄빙선인 게야.’


갑자기 북극해의 쇄빙선을 떠올렸습니다. 몇 해 전 그렇게도 자랑하던 삼성의 쇄빙선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배라고 했습니다. 북극해의 그 두꺼운 얼음을 깨고 전진합니다. 얼음에 갇혀있는 화물선을 구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내 앞에 있는 보트는 이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얼음을 깨뜨리며 전진하고 있으니, 쇄빙선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기야 멸치도 생선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믿어주기로 했습니다. 잠시 활동 모습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얼음이 더 이상 얼지 않도록 훼방을 놓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얼음을 밀어내며 물결을 일으킵니다. 곧바로 전진하는 게 아닙니다. 요리조리 지그재그, 방향이 제 맘입니다.


저 앞쪽을 보니 선창에 큰 배가 숨을 죽이고 작은 배를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한 거야.’


흐뭇해 보이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되어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승객이 없는 탓입니다. 그렇다고 놀아야 할까. 작은 배만 고달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됐든 이 세상에는 완전한 공평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볼품없이 부서진 얼음덩이를 보면서 날이 빨리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물로 돌아갔다 다시 얼음으로, 두꺼운 얼음으로 태어났으면 합니다. 부풀 대로 부풀어 일 미터 정도의 두께로 자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추어진 내 속내를 보여야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스케이트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집 어디엔가는 스케이트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나와 스무 살 정도 차이 납니다. 내가 직장을 옮길 때마다, 이사를 할 때마다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겨울이면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호수를 바라볼 때마다 종종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만큼은 호수에서도 스케이트를 타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생각뿐 내 소원이 이루어진 일은 없습니다.


‘위험. 접근 금지.’


안내판이 곳곳에서 장승처럼 움직일 줄을 모릅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이 공원 저 공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야외 스케이트장에 이르렀습니다.


‘12월 24일 스케이트장 개장.’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궁금합니다. 공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관계자들은 개장에 여념이 없습니다. 나에 대해 관심 밖입니다. 그들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매표소, 휴게소, 의무실, 장비 대여소, 스케이트장, 눈썰매장 등, 작은 규모에 비해 갖출 것은 다 갖추었습니다. 장소는 다르지만 작년에도 그랬습니다.


작년에는 세 차례정도 스케이트를 탔습니다. 첫날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버벅거렸습니다. 다음 날은 곧 예전의 실력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요즘 텔레비전을 통해 본 숏트랙 스케이트 경기가 떠올랐습니다. 내 나이가 적다면 선수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니만큼 조심을 해야 합니다. 지금의 나이에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스케이트를 꺼내 정비를 해야 합니다. 녹슨 곳은 없는지 날은 잘 서 있는지, 왁스 칠은…….


그날의 기분은 좋았는데 오늘은 다릅니다. 날씨 탓일까. 먹구름이 드리운 날씨에 손까지 시립니다. 장갑이라도 끼고 나올 걸 그랬나 봅니다. 옷소매를 끌어내려 주먹을 감추었습니다. 얼음이 마냥 부풀어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보트는 계속 물 위에서 원을 그리며 놀고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일렁이는 물을 따라 얼음이 서로 부딪칩니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호수를 외면하고 발길을 옮깁니다. 찝찝한 추위가 내 마음을 건드립니다. 하늘도 호수도 내 발걸음도 찝찝합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야외 스케이트장, 내일은 오랜만에 스케이트를 타야겠습니다. 손이 시립니다. 장갑은 필수입니다. 옛 실력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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