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이 집안을 온통 시끄럽게 합니다. 침실로, 거실로, 주방으로, 작은 방으로, 서재로, 복도로, 현관으로 거침없이 따라다닙니다. 몇 차례 이곳저곳으로 피신을 하지만 찰거머리라도 된 양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소리는 소리로 죽여야지 하는 생각에 음악을 틀었습니다. 헨델의 G선상의 아리아, 구노의 아베마리아, 아니 라데츠키 행진곡 등, 여러 곡을 잠깐잠깐 귀에 담아봤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잠재우는 방법으로 다른 것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장소를 옮겨보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디로 갈까 막상 정한 곳이 없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전 개통된 지하보도를 통해 지하철역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역에 다다르면 어떻게 할까. 그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명을 잡는 게 최우선입니다. 이명이 심하니 눈까지 말썽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왼쪽 눈이 갑자기 불편합니다. 눈물이 주룩 흘러내립니다. 찬바람이 문제입니다. 아침 뉴스의 발표처럼 미세먼지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마스크를 주머니에서 꺼내 입과 코를 가렸습니다.
지하 주차장의 가장자리 통로를 따라 지하보도로 들어섰습니다. 바람이 따라오지 못하나 봅니다. 안온한 느낌이 듭니다. 눈물이 멈췄습니다. 눈뜨기가 수월합니다. 새로 단장된 지하보도가 썩 마음에 듭니다. 서울의 어느 호텔이나 건물의 통로 못지않게 잘 정돈되어 깔끔합니다. 새것은 늘 산뜻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아파트의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기대가 큽니다. GTX가 개통되면 곧장 지하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불빛에 매끄럽게 빛나는 텅 빈 벽이 아깝습니다. 벽면에 명화라도 몇 점 걸어둔다면 어느 갤러리 못지않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지하 통로는 횡단보도를 건널 필요가 없어 보행에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일기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눈, 비, 바람을 막을 수 있어 좋습니다. 덧붙여 조용한 것도 장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귀속은 시끄럽습니다. 조용해서일까 더 요란을 떱니다. 무언가 내 앞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경을 쓰다 보면 시끄러움을 잊을 수 있을 겁니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공상이지만 요만큼의 새로운 공간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또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는 집의 공간도 넓다는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방이 셋, 거실까지 있으니 두 식구 살기에는 넓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계획에 어긋난 일이 많았습니다. 집을 옮길 때마다 늘 제일 작은 평수를 원했습니다. 아파트 추첨에서 떨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사를 하고 싶었는데 많게는 7번이나 연거푸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요만큼의 내 공간’ 팔을 벌려 제자리에서 맴돌며 주위의 바닥을 살핍니다. 그렇습니다. 딱 요만큼이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의 넓이보다 크면 크지 작지 않습니다. ‘뭐 하게’ 다른 뜻은 없고 나만의 공간, 내 아지트로 쓰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공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호화스러운 공상입니다. 나의 평소 소박한 생각이지만 서울 사대문 안 어느 곳엔가 다락방만한 안식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살았기에 서울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전에 살던 곳이 딱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추억 때문인지 한동안 찾아다녔습니다. 몇십 년이 지난 후라 집은 온데간데없고 위치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예 지형이 바뀌고 낯선 동네가 되었습니다. 아파트가 들어섰는가 하면 넓은 길이 집을 통째로 삼켰습니다. 언덕이 깎이고 골짜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옛시조가 생각났지만 지금은 생뚱맞은 표현입니다. 산천은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인걸 또한 간 곳 없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개나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담장에 의지한 채 눈이 내려도 까치밥을 달고 있던 감나무는 하늘에 점을 지운 채 아득한 세월 속에 묻혔습니다. 고개를 흔듭니다. 지금 멈춰 서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통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 아지트였으면 하는 곳에서 두발을 딛고 벽면에 옛 그림자를 새기고 있었습니다. 저 앞에 자동문이 열립니다. 어떤 사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곧 그 사람을 지나쳐 가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한가운데 멈춰 있다가는 그가 무슨 오해를 할지 모릅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앞을 보며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깁니다. 뭐, 아무 일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낙서를 한 것도 아니고 벽면에 추억을 옮겨봤을 뿐이니까요.
역에 이르렀습니다. 어디로 갈까. 이명이 지루했을까요. 전철을 따라갔을까요. 귓속이 조용해졌습니다. 재빨리 탈출을 해야겠습니다. 지상을 향해 계단을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