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뚝배기에 밥을 짓다가 20230119
누군가 말했습니다. ‘압력밥솥에 압력 빠지는 소리를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만큼이나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불러 모으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운명 교향곡을 들어보았지만, 연관을 지을 수가 없는 생각이 듭니다. 대신 떠오르는 모습이 있습니다.
‘기차’
1970년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운행하던 스팀 기관차입니다. 나는 현실에 더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 멀리서 소리를 앞세우며 달려오는 검은 물체, 가까이 다가올수록 소리도 몸체도 커집니다. 정차하며 일시에 내뿜는 허연 연기는 제가 구름이라도 되는 양 안개라도 되는 양 하늘을 가립니다. 밥솥을 열 때 김이 눈을 흐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솥의 추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말합니다.
“기차가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네.”
밥솥이 할 일을 마치고 일시에 내뿜는 김은 나도 기차만큼 할 일을 했다는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저녁밥을 지었습니다. 서울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 식사를 하시면 곧바로 일터로 향하셨다 밤늦게 돌아오셨습니다. 저녁밥은 내가 지어먹어야 했습니다. 식사 준비라야 특별히 할 게 없습니다. 밥을 짓는 외에는 김을 굽거나 가끔 국을 끓여보는 정도입니다. 밑반찬은 어머니가 미리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처음 연탄불 위에 밥을 하는 일은 보기와는 달리 어려웠습니다. 시간 조절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 조절도 어려웠습니다. 밥은 타기도 하고 설익기도 했습니다. 밥솥을 여러 번 태웠습니다. 익숙해지자, 마음이 풀렸을까. 솥을 불 위에 올려놓고 잠시 따스한 아랫목에 누웠습니다.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뜨는 순간 매캐한 냄새가 납니다. ‘아차’ 하는 순간 부엌으로 갔지만 이미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솥단지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나무 뚜껑이 숯처럼 검게 타며 연기가 솟아오릅니다. 재빨리 물을 부었습니다. ‘푸’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연가가 솟아오릅니다. 부엌이 짙은 안갯속처럼 흐려졌습니다,
밤늦게 돌아오신 어머니는 ‘큰일 날 뻔했구나, 데인 곳은 없니?’ 하는 말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우리는 저녁과 아침을 굶어야 했습니다. 뒤로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압력밥솥의 좋은 점은 보온 기능입니다. 몇 시간 동안 밥이 식지 않도록 보관할 수 있습니다. 식구 중 늦게 귀가해도 밥을 새로 짓지 않아도 되니 식탁을 차리는데 큰 부담이 없습니다. 주부들을 끊임없는 일에서 해방해 준 냉장고, 세탁기만큼이나 고마운 존재입니다. 나는 밥을 지으면 꼭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발에 밥을 담아 아랫목 담요 속에 넣어둡니다.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꺼내 드려야 합니다. 방 한구석에는 개다리소반이 있습니다. 수저와 함께 찬이 조각보 밑에 숨어 있습니다.
결혼 후 나는 늘 기차 소리를 들으며 살았습니다.
“기차가 정류장에 도착했어요.”
“아들 밥 먹어야지.”
기차가 연식이 지나면 고장이 나는 것처럼 밥솥도 어느새 몸이 아팠나 봅니다. 서비스 센터를 찾았습니다. 더는 작동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몇 차례 새 식구를 들여야 했습니다. 이때마다 밥 이외에 다른 음식도 조리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보온 기능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찜을 할 수 있고 죽을 쑬 수 있고 탕을 끓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입니다. 아내가 뚝배기에 밥을 하고 있습니다.
“웬일이야.”
“전기밥솥이 고장 나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공기에 담았습니다. 맛있다고 했더니 인터넷을 검색해서 설명을 보고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한 밥이 더 맛있는데.”
어느 날 아들이 말했습니다. 전에도 밥솥이 고장 나 양은 냄비에 밥을 한 일이 있습니다. 아내가 한 밥이 평소에 비해 질었습니다.
“내가 밥을 잘하는데,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게 중요해.”
“그럼, 당신이 한 번 시범을 보여요.”
합격입니다. 아내도 아들도 만족했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늦은 밤 허기에 지쳐 돌아오신 어머니, 제 부주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