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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아침 마당 20240111

by 지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위가 바지랑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나라에도 바지랑대가 있나 봅니다. 아니요.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입니다. 이럴 수가 있나, 노인은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데 마땅히 부탁할 곳이 없나 봅니다. 손수 할 수 없고 동네에는 도움을 청할 만한 젊은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눈 쌓인 마당의 빨랫줄에는 바지랑대가 줄에 의지한 채 쓰러질 듯 비스듬히 걸쳐 있습니다. 바지랑대는 빨랫줄의 도움을 받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낡을 대로 낡아 겉이 희끄무레 퇴색되었습니다. 줄을 받치는 홈이 쪼개져 삼분의 일이나 갈라져 있습니다. 마음이 심란한 노인은 이웃의 친구에게 하소연했습니다.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 땅에 끌릴 것 같답니다. 같은 처지라서 귀담아들었습니다.


그 흔한 빨랫줄과 바지랑대를 이제는 도시에서 보기가 어렵습니다.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시골에 가도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바지랑대라는 말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머뭇거릴 사람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 방법이 변하니 새로운 말이 생겨나고 과거에 사용하던 단어가 사라져 갑니다. ‘어처구니, 시치미, 부리망, 이엉, 용마루…….

이 추운 날씨, 눈이 흠뻑 쌓인 겨울날에 무슨 바지랑대며, 빨랫줄이냐고 하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필요할 경우가 있습니다. 빨랫줄이라고 해서 빨래만 널겠습니까. 하기야 추워도 빨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세탁기가 사람의 일손을 덜고 있기는 해도 아직도 손빨래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 나이 든 분입니다. 세탁기로 하는 빨래는 때가 고르게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는 말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옷을 입다 보면 목이나 소매 부분은 때가 더 타게 마련입니다. 이런 곳을 집중적으로 비벼주어야겠지요. 세탁기야 그렇습니까. 회전하면서 골고루 때를 빼앗아 가니 조금은 미심쩍을 수가 있습니다. 세탁기의 빨래도 손빨래도 다 같이 줄에 널어야 합니다. 빨랫줄을 사용해야 하는데 바지랑대가 말썽입니다. 그나마 사용하는 게 언제 더 쪼개져 못쓰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빨랫줄이 있는 마당이 내 놀이터였습니다. 빨래가 널리면 술래잡기 장소로 좋습니다. 이불 빨래라도 하는 날이면, 소청으로 만든 동생의 긴 기저귀라도 널리는 날이면 동생과, 아니 혼자서도 신이 납니다. 찾아줄 사람은 없어도 얼굴을 가리는 재미가 있습니다. ‘까꿍’ 갓난아기를 어르듯 허공에 얼굴을 내밀며 미소를 짓습니다.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해님에게, 구름에, 바람에, 날아가는 새에게…….

깜짝 놀랐습니다. 까꿍 했는데 낯 모르는 어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웃집을 찾아온 손님인데 울타리 너머로 내가 보이자 장난 삼아 살금살금 내 앞으로 다가섰던 것입니다. 환한 미소가 일순간 일그러졌습니다. 동생의 기저귀에 얼굴을 감추었습니다. 당황한 나에게 ‘미안 미안해’하며 찾아갈 집을 물었습니다. 손님까지 나를 놀리다니 기분이 나쁩니다. 어제 이웃집 형이 논에서 썰매를 탈 때 나를 힘껏 미는 바람에 얇은 얼음 위로 미끄러져 물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짓가랑이가 땡땡 얼었습니다. 양말에 물이 젖어 신발도 얼었습니다.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손님을 앞세우려고 하다가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고 말았습니다.

술래잡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동생에게 이리저리 쫓기다 보니 실수로 그만 바지랑대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줄을 떠받치고 있던 대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바람에 그 큰 이불 홑청이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습니다. 홑청의 반 정도가 흙바닥에 닿았습니다. 엄마의 한나절 수고가 허탕이 되는 순간입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어어’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남아프리카 사위는 낡은 바지랑대를 살피고는 대나무밭으로 가 크기와 굵기를 가늠했습니다. 바지랑대가 세워졌습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


마음에 썩 들지 않나 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만 다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의 솜씨만 못하다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잘 만들어 주겠다며 손을 잡아주고 그의 일터로 향합니다.


겨울은 추위에 빨랫줄도 바지랑대도 한가한 계절입니다. 빨래가 널리는 날이 적습니다. 대신 눈이, 바람이, 햇살이 찾아옵니다. 아직도 오줌싸개의 지도가 그려진 담요가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있을까요. 빈자리를 내가 찾아갑니다. 내가 지금 할 것은 바지랑대로 초가 추녀 밑의 고드름을 떠는 일입니다. 불협화음이 일기는 하겠지만 아침이 막 지나가는 동안 햇살을 받으며 목금(木琴)을 두드리는 시간입니다. 밖의 눈이 어느새 녹고 있습니다. 추녀 밑으로 눈물이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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