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16. 학교 앞에서 머물다가. 20240112

by 지금은

산책하는 중입니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는 듯하더니만 진눈깨비로 다시 비로 돌변했습니다. 거세지는 빗줄기를 피해 건물 옆 그늘막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산을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아내가 포근한 날씨이니 비라도 내릴 것 같다며 우산을 챙기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일기예보를 본 게 잘못입니다. 시간을 보니 곧 볕이 날 거라는 알림에 기상대 예보를 믿었습니다. 20·30분 사이에 예보가 바뀌었을까요. 휴대전화에서 확인하니 빗줄기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뭐야, 장난도 아니고.’


할 일 없이 서성입니다. 발걸음처럼 생각이 멈췄습니다. 좁은 공간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몸을 움직입니다.


“안녕하세요.”


생각지 않은 아이의 인사말이 귀를 찾아옵니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낯선 얼굴입니다. 퍽 낯선 얼굴입니다. 이국적인 아이입니다. 다문화 가정 어린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렷한 말씨에 정답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헉헉 숨에 찬 호흡이 들립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우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학교를 나서자, 이곳까지 부지런히 달린 것 같습니다. 가방의 지퍼가 풀려있습니다. 다 넣지 못한 물건들이 불룩 솟아있습니다.


“방학하는 날이구나.”


글피라고 합니다. 개인 사물을 챙겨갑니다. 이것저것 꽤 많습니다. 가방에 다 넣지 못해 양손에도 들려 있습니다. 벤치에 내려놓는데 물건 하나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헐떡이다 보니 곧바로 잡을 여유가 없나 봅니다. 숨을 고른 아이는 다시 가방을 메고 양손에 물건을 주섬주섬 들었습니다. 가방의 물건이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불규칙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꺼내서 잘 담아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일을 터득해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 요즘은 이것저것 참견을 많이 하는 부모가 많은데 낯선 나까지 간섭해야 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습니다.


당분간 엄마와의 전쟁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방학했지만 요즘은 어디 공부를 놓을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야 늘 펼치던 책가방을 구석에 팽개치고 마음껏 뛰놀고 게으름도 피우고 싶지만 그게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배움이 좀 부족하기는 하셨어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재촉하거나 부담을 주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만 간섭하셨습니다. 지금의 세상과는 달리 남과의 경쟁을 바라지 않으셨는지 모릅니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늦잠을 자고 식사를 했습니다. 친구들과의 놀이도 자연스레 늦었습니다.

“방학해서 좋겠네.”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방학하는 게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부터는 더 바빠질 거라고 합니다. 요일별로 배울 것을 헤아립니다. 하루에도 몇 가지나 됩니다. 분명 숙제도 많을 거라고 했습니다. 편의점에서 종종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의 이야기 속에는 협동해서 하는 놀이도 공부의 일부가 아닌가 짐작했습니다. 지식을 쌓는 일에만 열중하니 놀이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가 봅니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말도 합니다. 내 어린 시절을 더듬어보면 모든 게 놀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놀 친구가 없다는 말이 낯설게 다가옵니다. 대다수의 어린이가 학원에 간다는 의미입니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직접 들으니, 실감이 납니다. 어쩌다 아이들이 하교할 때 학교 앞을 지나치는 일이 있습니다. 차들이 길가에 줄지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태우러 오는 차입니다. 학원 차도 있지만 부모의 차가 많이 보입니다. 아이가 교문을 나서자마자 엄마는 납치하다시피 아이를 차에 몰아넣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어디겠습니까. 분명 학원이라 여겨집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경쟁사회에 내몰려 있습니다. 속사정을 일일이 파헤칠 수는 없지만 나와의 경쟁이 아니라 분명 남과의 경쟁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만큼이나 나름대로 고생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고생했고, 지금은 지식 습득에 내몰려 경쟁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가 고프기는 했어도 머리 아픈 일은 드물었습니다. 방학이면 느긋한 아침, 느긋한 점심, 느긋한 저녁입니다.


오늘은 내 마음과는 다른 날씨입니다. 기다리기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다시 눈발이 날립니다. 햇빛을 기다렸는데 찾아오지 않고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서너 시간을 그늘막에 갇혀 있었습니다. 학부모도 아니면서도 학부모처럼 아이들을 한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주시했다면 손자를 데리러 온 할아버지로 착각했을지 모릅니다. 엄마나 할머니의 우산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할아버지의 우산을 건네받는 아이도 몇몇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우산을 내미는 순간 가방은 어른의 한쪽 어깨에 매달립니다. 마치 어른이 학생이라도 된 양 가방이 어색하지만 등 한쪽에 붙었습니다. 요즘은 내가 방학을 한 기분입니다. 일찍 깨던 잠이 늦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같은 발걸음이기는 해도 마치 방학이라도 한 양 느긋한 걸음걸이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에 동화(童話)의 씨앗을 심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