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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숟가락 같은 볼펜이지만 20240113

by 지금은

내 책상도, 거실 탁자에도, 가방에도, 책갈피에도, 공책 갈피에도 보이는 필기구는 볼펜입니다. 언제부터 볼펜을 사랑했다고 여기저기 볼펜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보이는 거라고는 붓펜, 사인펜 정도입니다. 볼펜은 가을입니다. 들판에서 추수하고 나면 벼가 쌓이듯 내 주위의 필기구는 온통 볼펜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에 볼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연필이 몇 다스나 됩니다. 글씨를 쓰는 연필이 있고, 그림을 그리는 연필도 있습니다. 사인펜도 몇 자루 있고, 만년필도 여러 개 있습니다. 검정 잉크, 파란 잉크도 있습니다.

이 여러 가지 필기구 중 요즘 사용하는 것은 늘 볼펜입니다. 요즘뿐만 아니라 볼펜이 손에 익은 게 언제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습니다. 단 한 가지 초등학교 때는 연필을 사용했고, 중학교 때는 펜을 사용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어떤 필기구를 사용했는지 가물가물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볼펜을 사용했을까, 그때의 공책이라도 남아있으면 가늠할 수 있겠지만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편지도 없고 책도 없습니다. 교과서라도 있으면 낙서의 흔적, 아니 이름을 쓴 것이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할 때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볼펜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볼펜을 본 게 초등학교 졸업 무렵이니 참으로 오래전입니다. 고모의 심부름입니다.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볼펜을 사면서 처음 보았습니다. 고모가 결혼을 앞두고 고모부에게 편지를 자주 썼습니다. 우표를 붙이는 일도 내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볼펜은 구경만 할 뿐 사용해 본 일은 없습니다.


중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는 필기할 때 펜과 잉크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볼펜을 사용하면 잉크가 미끄러워 글씨를 바르게 쓰지 못한다는 이유입니다. 사용이 서툰 나는 잉크를 손에 묻히며 생활했습니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잉크를 엎지르기도 하고 펜에 잉크를 너무 많이 찍어 책상은 물론 공책이나 책에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얼룩이 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이런 일로 싸움이 벌어진 일도 있습니다. 뒤에 있는 친구의 잉크병이 엎어졌습니다. 앞자리 친구의 교복 등에 퍼렇게 물이 들었습니다. 앞의 친구는 뒷사람의 실수라고 하고, 뒷사람은 앞의 친구가 의자를 뒤로 미는 바람에 흔들려 잉크가 쏟아졌다고 옥신각신 한 일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앞자리의 친구는 한여름 동안 얼룩진 교복을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의 학생도 눈에 뜨였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어떤 사람이 고등학교 시절 볼펜을 놓고 장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기라고 하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과자 한 봉지를 걸고 볼펜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시합을 했답니다. 연필처럼 길쭉한 볼펜은 나름대로 부품이 정교합니다. 몸통, 앞뚜껑, 볼펜 심, 스프링, 똑딱이 걸쇠, 나사는 쉽게 풀리지만 뚜껑 걸쇠를 분리하자면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손끝의 감각이 미세한 녀석이 결국 이깁니다. 내기에서 이기고 싶어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한때 손가락에 볼펜을 얹고 묘기를 보이는 돌리기도 유행했습니다. 군 생활을 할 때 총기 분해 결합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초창기의 볼펜은 옷에 잉크 물이 드는 것만큼이나 좋지 않은 상황도 있었습니다. 애기똥풀이 흘러나오듯 잉크 똥이 흘러 손이 잘못 닿으면 손은 물론 공책이나 책에 묻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윗주머니에 넣었는데 잉크가 흘러 옷을 버린 일도 있습니다. 볼펜 심에서 흘러나온 잉크는 펜에 묻혀 쓰는 잉크와는 점성이 달라 세탁을 해도 입기에 불편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은 늘 시행착오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제는 볼펜이 필기구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해도 어색한 말은 아닙니다. 서민의 필기구가 된 모나미 153은 국내 대표적인 문구 기업 모나미에서 만든 한국 최초의 ‘잉크를 담은 펜’입니다. 육각 모양의 흰색 몸통과 검은색의 머리를 가졌습니다. 오랜 시간 ‘국민 볼펜’ 자리를 지키며 사랑받았습니다. 앞자리 15는 15원이라는 의미고, 뒷자리 3은 모나미가 만든 세 번째 제품이라는 뜻입니다. 모나미는 ‘내 친구’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mon ami’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볼펜도 유명 만년필만큼이나 고급 제품이 시중에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새 볼펜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지만 자연스레 몸과 마음에 익숙해졌습니다. 식사할 때면 숟가락을 들 듯, 글을 쓸 때는 볼펜을 들게 됩니다. 갑자기 익숙함에만 물들다 보면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입니다. 내일은 잠자는 만년필을 깨울 생각입니다.

또 다른 생각을 합니다. 펜에 잉크를 찍어 써볼까요. 상자를 열어보니 펜대는 있는데 펜촉이 없습니다. 번거롭기는 해도 문구점을 찾아가야겠습니다. 잠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보는 것도 낭만이 아닐까 합니다. 가끔은 외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잊을까 봐 잠자리에 들기 전 잉크병을 책상에 올려놓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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