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눈 위에 비친 도시락 20240116
창밖에는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어제의 세상과는 딴판입니다. 오싹 추운 느낌이 피부에 와닿는 느낌입니다. 햇살이 눈 위에 내리자, 밖으로 나왔습니다. 상가를 지나는데 유리창 안으로 앵두가 보입니다. 이 철에 웬 '앵두' 하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빨간 알갱이들이 건너편 눈 그림자에 소복이 담겼습니다. 눈 풍경 속에 더 진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아니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앵두가 아닙니다. 체리입니다. 품목의 이름이 코앞에 있습니다. 이 계절에 ……, 금방 생각을 돌렸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것이겠지.’ 그렇게 떠올린 것뿐입니다. 냉동 체리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냉동이냐,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것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겨울에 싱싱해 보이는 열매를 보았다는 자체입니다.
보리수 도시락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까? 도시락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았겠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합니다. 일 학년 때입니다. 상급 학년 형, 누나들이 도시락을 먹는 게 부러웠습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선생님을 졸라 학교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기로 했습니다. 날이 되자 할머니가 형의 양철 도시락을 들려주셨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신이 납니다. 맛있는 것을 가져왔다며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내 자랑에 몇몇 아이들이 다가왔습니다. 나나 친구들이나 기대가 큽니다. ‘짠’ 뚜껑을 열었습니다.
‘쌀밥, 달걀부침’
와르르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재빨리 뚜껑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알아차렸습니다.
“흥, 무슨 도시락이 그래.”
속기라도 한 듯 친구들은 한 마디씩 하며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감싼 채 얼굴을 책상에 묻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도시락을 열던 선생님이 왁자지껄한 소리에 내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와! 내가 좋아하는 도시락을 싸 왔네.”
선생님은 당신의 도시락을 내 책상 위에 놓고. 내 도시락을 가져가셨습니다. 마음에 그리던 도시락입니다. 흰쌀밥은 아니었지만, 좁쌀밥에 달걀부침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선생님의 도시락과 바꾸어 먹었다고 할머니께 자랑했습니다. 잠시 표정이 바뀐 할머니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6, 25 전쟁이 끝난 후의 시골 살림은 곤궁했습니다. 도시라고 해서 나을 것도 없습니다.
건물의 모퉁이를 돌자, 도시락이 넓은 진열장을 메우고 있습니다. 종류가 다양합니다. 밥보다는 반찬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했습니다. 육지, 바다에서 나는 식재료로 가공된 반찬이 칸을 메웠습니다. 이 많은 것이 언제 다 팔려 갈까 궁금해집니다. 도시락 천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류만큼이나 가격도 다양합니다. 양도, 질도 제각각입니다. 기호에 맞게 주머니 사정에 맞게 고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게 맛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사이 아내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먹고 싶은 게 있느냐는 말에 입맛을 다셨지만, 고개를 저었습니다. 입맛이 떨어졌다면 몰라도 아직은 아내의 손에 길든 맛을 변화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소년기를 지나고부터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시골의 맛에 익숙합니다. 음식도 그렇기는 하지만 자연의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열매로는 버찌, 앵두, 보리수, 머루, 다래, 으름, 호도, 밤, 감. 풀 종류로는 찔레순, 식영, 삘기, 아카시아꽃, 진달래꽃……. 한창 피어날 때면 슬며시 도시 근교나 산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이 모든 게 주전부리가 될 수 있습니다. 멀리서 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마주칩니다.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곳에서 슬며시 부릅니다. 맛을 보는 정도이니 자신을 내주어도 괜찮다 표정입니다. 다가가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지난해에도 입맛을 다실 수가 있었습니다. 누에가 좋아하는 뽕잎을 달고 있는 뽕나무 열매, 오디까지 입에 넣었습니다.
떫은 개보리수를 맛있게 먹었다고 하시던 선생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봅니다. 겉으로는 엄했지만, 속으로는 포근했습니다. 할머니는 선생님이 늦은 봄 전근 가시던 날 남다른 도시락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나 대신 고맙다고 하고 전해드려라.”
무엇일까요? 고향 집 울타리에 곱게 물든 앵두 도시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