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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봄기운 20240130

by 지금은

놀이터 옆입니다. 점심이 지난 오후 햇살이 모과나무를 찾아와 열매와 놀고 있습니다. 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데도 아홉 개의 모과는 든든하게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개수를 세어보기 시작한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날짜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소한 때부터 바라보기 시작했으니 여러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밤낮이 수 차례 바뀌었습니다. 바람이 휘몰아치기도 하고 세찬 눈발이 날리고, 진눈깨비가 질척 질척 거리더니 겨울답지 않게 세찬 비를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첫날 눈여겨본 아홉 개의 모과가 아직도 아홉 개입니다.

다른 모과나무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이미 열매를 떨어뜨렸는데 우리 집 둘레의 나무들은 열매를 아끼는 애착심이 유난히 질긴 듯 보입니다. 집 앞 놀이터의 나무의 열매는 아홉 개, 왼 편의 나무는 세 개, 오른 편의 나무는 다섯 개를 달고 있습니다. 나는 밖으로 산책을 나갈 때면 이들을 살펴봅니다. 그냥 살피는 게 아니라 개수를 늘 헤아립니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바닥으로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하루는 손가락질을 하면 떨어진다는 어릴 때의 말을 떠올려 왼손의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열매를 가리켰습니다. 다음 날 보니 변화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오른손의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열매를 가리켰습니다. 역시 변화가 없습니다. 또 다음 날은 쌍권총입니다. 왼손가락 오른손가락을 동시에 들어 겨누었습니다. 또 변화가 없습니다. 겨냥이 잘못되었을까요? 억지로 떨어뜨릴 이유가 없어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다 시기가 오면 나무와 열매는 알아서 이별을 할 겁니다. 인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유야 어떠하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게 진리입니다. 아쉬움도 있고 섭섭함도 있고 야속함도 있을 터이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알게 모르게 변화의 속에 휩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겨울날씨답지 않게 포근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모두 얼려버릴 듯 냉기가 내 주변을 감쌌는데 만물의 고통을 알아차린 때문일까요. 밖으로 나서자마자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겉옷으로 조끼를 입고 나온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을 발로 굴려봅니다. 발목이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탕탕’ 놀이터 경계의 낮은 벽을 향해 공을 찼습니다. 되돌아오는 탄력이 봄을 몰고 오는 듯 상쾌함이 묻어납니다. 서서히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굳은 관절을 풀어봅니다.


강아지가 지나가다 나를 바라봅니다. 나보다는 공을 바라보는 게 맞습니다. 구르는 공을 보며 굴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닌가 합니다. 연못 건너편 유아원에 다녀오던 꼬마가 내 옆으로 다가와 멈췄습니다. 씽씽이를 재빠르게 타고 오더니만 스케이트를 멈추듯 재빨리 정지했습니다. 나를 쳐다봅니다. 아니 공을 쳐다보는 게 맞습니다. 한 번 차보고 싶은 마음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나는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놀이터에 왔으니 놀이기구와 놀아야 합니다. 엄마와 놀아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시간을 죽이듯 다가옵니다.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이 마냥 굼뜹니다. 엄마가 드디어 내 가까이 다가와 아이 옆에 멈췄습니다. 아이는 씽씽이를 탄 채 묘기를 부리듯 내 주위를 뱅글뱅글 돕니다. 아무래도 공에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공차기를 멈춘 채 아이 엄마처럼 바라봅니다. 모르는 누가 바라본다면 친할아버지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몇 바퀴나 돌았습니다.


“공 차고 싶니, 함께 찰까?”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밖으로 내밀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의 미소를 불러내지 못했습니다.


아이엄마가 자리를 떴습니다. 아이도 하던 짓을 멈추고 뒤를 따랐습니다. 잠시 후 도란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차던 공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네 쪽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꼬마는 어느새 겉옷을 벗었습니다. 미끄럼틀을 오르내립니다. 까르르, 햇살이 아이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나도 조끼를 벗었습니다. 또 다른 햇살이 내 몸에 붙었습니다.

세 번째 햇살이 건너편 사람에게 달려갔습니다. 스마트 폰이 지지대와 함께 반짝입니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아까부터 한 여인이 혼자 놀고 있습니다. 카메라 지지대에 스마트 폰을 고정시킨 채 티 하우스를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담기에 열중입니다. 처음에는 얼굴을 찍는 줄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몸매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뒤로 움직입니다. 돌아서기도 합니다. 동영상을 찍고 있습니다. 같은 자세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몇 벌의 겉옷을 벗었다 입었다 합니다. 의상 촬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잠시 아이에게서 눈을 빼앗겼습니다.


공을 몇 차례 굴리는 사이에 햇살과 함께 여인이 사라졌습니다. 아이도 아이엄마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등이 갑자기 이불속처럼 따스해집니다.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살이 모과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겨울을 잘 견디고 있는 거야. 입춘이 하늘에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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