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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빈말 20240208

by 지금은

‘빈말’을 주제로 글을 쓰다가 그만 날려버렸습니다. 평소와 달리 마음이 편치 않은 탓인지 쓰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겨우 한 페이지 남짓 썼습니다. 쉬고 싶은 마음에 컴퓨터를 닫았습니다.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데 같은 번호가 떴습니다. 어제의 글 번호와 오늘의 글 번호가 같습니다. 잠시 어제의 것을 확인해 보니 이마저도 쓰다 만 것입니다. 몇 줄이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진전될 것 같지 않아 지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곧 실천에 옮겼습니다. 같은 번호가 하나 사라지니 차례가 맞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내용을 그만 바꿔 지우고 말았습니다. 한 장 남짓한 글이 통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잘못 본 것은 아닐 거라고 하는 마음에 다시 확인했지만 변화가 없습니다. 지워야 할 것은 지우지 못하고 써야 할 것을 지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나머지 번호도 지웠습니다. 지우면서 남아있던 번호가 밉게 느껴졌습니다.

오전부터 집안의 누수로 인한 문제로 전화기를 얼굴 가까이 대고 사업자와 잠시 옥신각신했습니다. 도배 관계입니다. 두리뭉실 넘어가려는 그와 정확을 꾀하려는 나 사이에 간극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서류에서 하자가 보였습니다. 서류와 일의 사이에 괴리가 있습니다. 일 처리를 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무 의심한다는 투입니다. 허점을 늦게 발견한 게 실수입니다. 천천히 여유를 두고 확인해야 했는데 상대를 믿은 게 잘못입니다. 똥 싼 놈이 화낸다더니만 급한 성격의 안하무인입니다. 화를 낸다면 오히려 내가 내야 맞는 데 전화기가 깨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언성을 높입니다. 목소리를 낮추고 차근차근 말하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하더니만 그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속은 상하지만 그만 끝을 내기로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이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는 하고자 하는 게 잘되지 않습니다. 글쓰기라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습니까. 오히려 감정에 휘말리다 보면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내일부터 명절 연휴입니다. 그동안 읽을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일 층에서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귀를 찢을 듯 괴성이 좁은 공간을 울렸습니다. 깜짝 놀라 소리 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꼬마가 엘리베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버럭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세 모자가 옹기종기 붙어있습니다. 꼬마는 무언가 불만이 있나 봅니다. 일그러진 표정이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잠시 당황해하는 눈치입니다.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고 보니 아이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할아버지께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엄마가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면 반복적으로 인사말을 합니다. 그러자 아이가 마지못해 인사를 했습니다. 순간 나는 빈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휴, 귀엽기도 하지. 인사를 예쁘게 하네.”


미소를 짓자, 아이의 얼굴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엄마는 옆에 있는 형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합니다.

나는 또 빈말했습니다. 씩씩한 어린이라고 하며 어제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인상이 좋다는 말도 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이 온화한 기운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내릴 층이 보이자, 세 모녀는 친할아버지라도 되는 양손을 흔들며 고개를 숙입니다. 빈말이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이처럼 빈말이 좋은 점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반감을 사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빈정거리는 말투로 들렸을 때입니다.


한마디의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빈말에 관한 할머니의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되살리려고 했지만, 지워진 것을 지금 다시 복원한다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오래 사신 할머니께는 오래 사시라는 빈말이라도 자주 했지만, 세상을 일찍 뜨신 어머니께는 이마저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오래오래 사세요.’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최고예요.’ 등입니다.


30일 동안 한 편의 글을 하루도 빠짐없이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한 차례 성공했습니다. 이어 두 번째 시도도 두 편을 더 쓰면 됩니다. 마음이 산란한 하루였지만 쓰지 못할 것만 같은 글을 한 편 쓰게 되었습니다. 집념도 집념이지만 습관이 나를 앞으로 끌고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빈말이 분위기를 바꾸기도 했지만 또 다른 말은 목청을 한없이 돋우는 일이 되었습니다. 참말보다 빈말이 더 좋은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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