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멍청했던 발걸음 20230209
근래 들어 나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마음마저 둔해지는 느낌입니다. 나이 듦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낯선 곳에 가면 유난히 판단력이 흐려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두 시간 남짓 거리를 네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오늘은 형님을 뵙고 왔습니다. 일찍 집을 나서 걷고 두 번 전철을 환승하였고 다시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초행길이니 발걸음이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집에서 나름대로 길을 익혔지만, 막상 현장에 이르면 마음같이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정류장에서 노선을 확인하는데 자꾸만 헷갈립니다. 정류장을 찻길 사이에 두고 건너기를 두 차례나 반복했습니다. 겨우 가야 할 길을 알아냈지만, 두 버스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듯 도착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알림판을 보니 하나는 아직도 차고지에서 출발하지 않은 채 대기 중입니다. 버스가 이렇게 뜸하게 다녀서야 하는 푸념 섞인 말이 입에서 맴돕니다. 시내버스인데도 30여 분을 기다려서 타야 했습니다.
전에는 형님 집에 들러 조카의 차를 타고 함께 갔기 때문에 길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은 혼자 버스를 이용하려다 보니 병원의 위치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겨우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다음부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도를 스마트 폰에 찍어 두었지만, 확인하는 순간 방향감각을 잃었습니다. 분명 은행 근처임을 알기에 주위의 간판을 보며 두리번거렸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외국의 어느 곳에 가 있는 기분입니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두 노년의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안 돼 보였을지 모릅니다.
“어디를 찾으세요?”
스마트 폰에 저장한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뒤편이라며 방향을 가리키더니만 내가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한 사람이 안내를 해주겠다며 앞으로 나섰습니다. 몇 마디의 말을 나누는 동안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점잖은 인상의 외국인입니다. 병원 앞에 이르러 입구를 가리켰습니다. 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돌아서려는 그의 소매를 잡았습니다. 뭔가 작은 마음이라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지만, 고개를 숙이며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사탕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습니다. 오늘이 연휴인 생각을 잠시 잊었습니다. 코로나 검사 기구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면회하기 위해서는 미리 진단 기구를 준비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몇 군데의 약국의 문이 닫혔습니다. 묻기를 반복하며 찾아 손에 들고 병원에 들어섰습니다. 이래저래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습니다.
형의 상태는 그대로입니다. 병세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습니다. 형수가 말하기를 일주일 전에 문병을 다녀왔다기에 나 혼자라 생각했는데 조카 내외와 손자가 와 있습니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말수가 적다 보니 이야기를 잠시 끊기기라도 하면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는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어색함입니다. 싸가지고 간 간식을 형 앞에 풀었습니다. 조카가 먼저 같은 과일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맛만 보여주고 오후나 밤에 드시라고 했습니다.
조카 내외가 떠날 때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형님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가는 길이 걱정됩니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낯선 곳을 찾아가야 할 때 걱정되는 일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전철역에 갈 때 버스노선을 못 찾아올 때처럼 당황하는 게 아닐지 하는 마음을 잠재울 수가 없습니다. 온 김에 형수님도 뵙고 가야겠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돌아오는 전철역에서 또 실수했습니다. 아차 하면 가야 할 방향과 반대로 발길을 옮길 뻔했습니다. 이정표를 잘 보고 승강장으로 가서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뭔가 마음이 쓰입니다. 하지만 노선을 보아도 이상이 없습니다. 이때 건너편 전동차가 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머리를 보니 인천행이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방향이 분명 인천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에 홀린 느낌입니다. 전동차가 홈을 벗어날 때 뒷면이 보입니다. 분명 ‘인천’이라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이때 전동차가 내가 서있는 곳에 정차했습니다. 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인천이라는 글씨를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차는 출발했습니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빈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물어보면 되는데’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승객이 모두 승강장을 빠져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을 잠시 가다듬었으니 다시 승강장의 노선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집과는 반대 방향에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시 계단을 올라 반대편 승강장으로 갔습니다. 잠시 후 열차가 도착했지만 중간 기착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차를 기다립니다. 또다시 30여 분이나 지체되었습니다. 바보라도 된 기분입니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옵니다. 눈이 감길 것만 같습니다. 차에 오르자, 의자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깊은 잠은 아니었지만, 용케 환승역에서 눈을 떴습니다. 집에는 왔는데 머리는 아직도 흐린 날입니다.
내가 언제 외국 여행을 했던가. 오늘은 마치 그곳에서 홀로 떨어져 있던 기분입니다. 이제는 ‘나도 늙었구나.’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