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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 때가 있는 법 20240215

by 지금은

‘늦은 나이란 없다. 늦을 때란 없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렇다고 꼭 노인에 대해 한정된 말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도 다가설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 더 와닿은 말이라 여겨집니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 노인들과 모임에 어울리다 보면 가끔 ‘이 나이에 해서 뭐 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심심해하기에 유익한 시간을 보내보라고 취미 생활이나 배울 것을 권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나를 멋쩍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반응은 어떨까요. 그렇겠군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와 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름을 인식하는 순간입니다. 그에게 ‘무엇인가’ 하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익히는데 목마름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지구가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의 말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는 것의 결과가 어차피 내일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의미 없는 행동이 될지 몰라도, 이것이 내게 뜻있는 일이라면 하겠다는 마음입니다. 하는 일이 앞으로 무엇에 쓰일지는 어떤 효용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가치가 없다고 해도 나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배우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내 주위를 돌아보는 시선이 부족하지 않았을지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예로 옛날이야기를 하나 가져올까 합니다. 조선 숙종 때입니다. 임금이 어느 날 야행을 하는 도중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쓰러져 가는 집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 집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변변치 못한 움막에서 웃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어리둥절해진 그는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물 한 사발을 청했습니다.


물을 마시는 동안 슬며시 문틈을 살펴보니 수염이 흰 할아버지가 새끼를 꼬고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이 짚을 고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습니다. 모두 표정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어보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이렇게 살아도 빚 갚아 가며 저축도 할 수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지요.”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곧 쓰러질 듯한 움막집에서 살면서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주인이 몰래 돈을 감춰 둔 것은 아닌지 아랫사람을 시켜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 집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습니다.


“부모님 봉양하는 것은 곧 빚을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이 아니겠소? 어떻게 이것보다도 더 큰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황금이 귀한 것이 아니고, 편안하고 즐거움이 돈보다도 값어치가 더 크다는 뜻입니다.


나는 남들에게 배움을 권하면서 정작 실천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빚을 갚지 못했고 저금하지도 못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내일, 내일 하는 사이에 부모님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저금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여의찮습니다. 아들은 혼기를 훨씬 지나쳤는데도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사자도 나도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중이 제 머리 깎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가족들이라도 나서야 하는데 자신이 알아서 하기를 기다립니다.


세상에 늦은 나이란 없다고 하지만 배움과는 달리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에서는 때가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바심을 느낍니다. 아이가 있는 집안에 비해 마음이 썰렁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밖에서 유모차가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갑니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모습을 보면 저 아이가 내 손자 손녀였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까르르’ 부모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놀이터를 채웁니다. 표정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봅니다.

나에게는 늦은 나이가 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사고서야 결혼했습니다. 자식도 은근히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이 낳기 싫어하고 키우기 어려워하는 요즘, 인구의 감소는 나라와 국민 모두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자체와 국가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업체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온 동네가 키운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이 있습니다. 이제는 동네뿐만 아니라 국가가 나서고 있습니다. 늦은 나이란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은 영역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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