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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 새해의 복 20240217

by 지금은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벽에 걸려 있는 조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으로 보아 어느 민속촌의 초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어린 시절 고향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조리와 함께 한 삶이 언제인가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중학교 시절을 끝으로 손에서 멀어졌습니다.


조리는 대나무나 싸릿가지의 속대를 엮어 만들어 쌀을 비롯한 곡식을 이는 용구입니다. 조리를 일어 그해의 복을 취한다고 하여 '복 들어오는 조리'라는 뜻에서 복조리라 부릅니다. 섣달그믐날 자정부터 정월 초하루 아침 사이에 조리 장수는 복 많이 받으라고 소리치며 조리를 집 마당에 던져놓았습니다. 이는 서울에 살 때이고, 시골에서 지낼 때는 어른들이 손수 조리를 만들었습니다. 넉넉하게 만든 사람은 이웃들과 서로 나누어 가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은 싸릿가지로 만든 조리를 사용했습니다. 이유는 싸리가 주위에 흔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는 먹는 게 우선입니다. 삼순구식(三旬九食)은 아니어도 삶이 넉넉하지 못하던 시절 쌀은 최고의 먹을거리입니다. 얼마나 쌀밥이 먹고 싶었으면 쌀과 비슷한 모양의 꽃을 보고 이팝나무라는 말을 지어냈겠습니까.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경제의 성장은 조리를 부엌에서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제는 조리 기구가 아닌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유 전통이 새로운 물결에 의해 점차 잊혀가고 있습니다. 절구통이며 맷돌이 그 예입니다.


복 이야기가 나왔으니, 복에 관한 것으로는 복주머니가 있습니다. 색채의 천에 길상의 무늬를 새긴 주머니로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차고 다녔습니다. 우리 전통의 한복에는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주머니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복주머니를 차면 일 년 내내 나쁜 기운을 쫓아내고 만복이 들어온다고 하여 친척이나 자손들에게 나누어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입니다. 어린이들이 설날에 차고 있던 색동주머니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내가 복주머니를 차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내가 결혼하고 자식을 두었을 때입니다. 집안 어른이나 조카들에게 줄 세뱃돈이 필요했습니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인사치레하는데 돈만 불쑥 내밀기가 어색했습니다. 그 후 봉투에 넣었지만 이마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 끝에 어느 날 종이 복주머니를 생각했습니다. 한창 색종이 접기에 빠져있을 때입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맘에 드는 종이접기를 찾을 때 복주머니가 눈에 뜨였습니다. ‘이거야.’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빨간색이나 노란색을 좋아합니다. 서양에서는 사랑과 열정을 상징하며, 동양에서는 행운과 길조의 색으로 여깁니다.

A4 크기의 색 한지를 구해 복주머니를 접었습니다. 지폐를 넣어 반으로 접으니 크기가 꼭 맞습니다. 주머니의 앞에 복(福)이라는 글자를 써넣었습니다. 세배할 때, 세배를 받을 때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받는 사람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기해합니다.


“정말로 만든 거야.”


믿지 않는 눈치입니다. 어디서 사 온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종이접기를 잘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제야 종이접기를 잘한다고 자랑했습니다. 매달리는 조카에게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손이 아직 여물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몇 차례 접기를 시도했지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미리 접어놓은 빨갛고 노란 복주머니가 작은 상자를 채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별 효용가치가 없습니다. 세배할 어른이 한두 분씩 세상을 떠났습니다. 내가 세뱃돈을 주어야 할 어린것들은 어느새 성장을 하여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둘 흩어지면서 명절날 만날 기회가 점차 멀어집니다.


어제는 물건을 정리하다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설날이 지났지만, 봄기운을 느끼지 못했는지 포개어져 잠을 자고 있습니다. 얌전히 내년의 설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깨우고 싶은 마음에 접힌 종이를 펼쳐 다시 접어봅니다. 알쏭달쏭하던 접기가 살아났습니다. 접힌 선이 있으니, 손이 저절로 따라갑니다. 누구에게 줄 것도 정해져 있지 않지만, 복 자를 써봅니다. 남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나 스스로에게 복을 선사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올해는 남의 복 대신 나의 복을 챙기는 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를 세어봅니다. 몇 장을 넣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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