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57. 산책 20240216

by 지금은

산책의 계절이 돌아옵니다. 그동안 움츠러들었던 몸을 활짝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 산에 봄빛이 돈다고 했는데 어느새 앞산에 도착한 듯합니다. 겨울은 나를 답답하게 했습니다. 싸늘하고 차가운 기운은 나를 자꾸만 집에 머물게 합니다. 다른 철에 비해 겨울은 배움이나 만남 자체를 어렵게 만듭니다. 학생들에게만 방학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른에게도 방학이 있습니다. 배움에 무슨 방학이 필요하겠느냐, 푸념하지만 화동 화개장터처럼 있을 건 다 있어야 하나 봅니다. 수시로 드나드는 노인복지관이 12월부터 2월까지 방학입니다.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인들이 거친 날씨에 오고 가는 중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 염려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변변히 나들이할 곳이나 머물 곳이 마땅치 않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저께는 계절의 날씨치고 기온이 높았습니다. 4월의 날씨 정도는 되나 봅니다. 일기예보를 듣고 얇은 겉옷을 입었는데 공원을 걷는 동안 햇볕을 온몸에 뒤집어쓰자, 목과 등이 따뜻합니다. 어릴 때 장작불이 이글거리는 겨울 시골 방 아랫목에 추억의 이불을 덮고 있는 기분입니다. 머리를 덮은 모자가 답답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자를 벗자, 이마가 시원함이 감돕니다. 땀이 슬그머니 배어든 때문입니다.

봄 같던 날씨가 어제오늘은 곤두박질쳤습니다. 저녁때까지 비, 눈, 진눈깨비가 섞여 내렸습니다. 진눈깨비가 내릴 때는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변했습니다. 잠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바람이 요동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흩어놓기도 하고 뒤섞을 태세입니다. 기세에 눌려 곧 창문을 닫았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쨍하고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하늘이 깨끗한 자체입니다. 눈, 진눈깨비, 비가 모든 것을 몰아간 듯 모든 것이 산뜻해 보입니다. 희미한 내 눈이 갑자기 밝아진 느낌이 듭니다. 오늘은 어떤지 아십니까. 기온이 주르르 미끄러져 그저께와 15도 이상이나 차이를 보였습니다. 지레짐작 겁을 먹고 밖으로 나가기를 포기했습니다. 며칠 전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 대학교 뒤편의 오솔길을 걷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산책로 중에 마음에 드는 한 곳입니다. 나무숲도 좋지만 좁고 구부러진 길 자체를 마음에 듭니다. 고향의 시골처럼 시냇물이 산굽이를 돌아가는 듯해서 물은 없지만 자주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바다가 눈에 들어옵니다. 간척사업으로 고깃배는 보이지 않아도 바다임을 알리는 갈매기들의 날갯짓이 나를 부릅니다.


산책합니다. 왜 할까요? 산책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산책은 누군가에게는 정신 수양을 하는 시간이며 즐거움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건강을 위한 움직임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고민을 해결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산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속에는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느긋함이 있고 때로는 절박함도 숨어있기도 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산책 속에 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언제는 느긋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기고 어느 경우에는 같은 발걸음에도 초조함이 들어있을 때도 있습니다. 발길에 비해 눈길이 다릅니다. 여유 있는 산책에는 넓은 시야가 있습니다. 주위를 살피며 자연의 변화나 아름다움을 감상합니다.

‘어느새 잎망울이 콩알만큼 부풀었다거나 소나무 순이 솜털을 펼치며 햇살을 반긴다. 햇살이 교회의 첨탑에 앉아 눈을 반짝인다.’


마음이 초조할 때는 눈에 들어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집으로 돌아왔는데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에 없습니다. 오로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종종 산책을 즐깁니다. 산책은 때때로 마취제나 진정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집이라는 공간에 오래 갇혀있을 때는 마음이나 몸의 고통이 크기가 커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바깥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진정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땅을 딛는 순간 긴 호흡과 기지개가 몸과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도 합니다. 장소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산책하는 동안 곧잘 나를 잊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동안의 생각을 잊은 채 다른 내가 되어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삶의 터전을 옮긴 이곳에는 산책로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곳들을 사랑합니다. 산책로가 다르듯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생각 자체도 달라집니다. 나무 화석이라 불리는 메타세쿼이아 길, 참나무 밭길, 키를 낮춘 해당화 길, 굽이굽이 소나무길, 동숭동 마로니에광장을 닮은 마로니에 길, 뱃길 따라 삼천리는 아니어도 오줌싸개 삼 형제가 버티고 있는 호수의 뱃길, 가을이면 열매를 가득 품고 가지를 늘어뜨린 귀룽나무가 바람에 일렁이는 길……. 각기 다른 얼굴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생각만으로도 산책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내일은 기온이 오른다는군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