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정월 대보름 20240224
부럼을 깨셨나요? 호도 세 쪽. 사과 서너 쪽.
귀밝이술은 자셨나요? 맑은술이 없고, 양주도 되는지 몰라 망설였지요.
오곡밥은 드셨나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인사말을 하셨나요? 입속으로 웅얼거리고 말았습니다.
'설은 길어야 좋고 보름은 밝아야 좋다.'
'닭 울음소리가 열 번 이상 넘기면 풍년이 든다.'
'달그림자가 여덟 치면 대풍이 든다.'
일 년 중 보름달이 12번 뜨지만, 첫 보름달은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정월대보름 하면 여러 가지 세시 풍속이 많지만 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구에 가장 가까운 위성이며 우주의 생명력을 지닌 종교상징물입니다. 달의 차고 기움에 따라 조석 간만이 크게 차이 나는 우리의 지형적 특성상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우리의 우주론, 인생관과 생활풍습에 관한 영향은 태양보다 달이 훨씬 컸으며, 신앙의 대상으로도 태양과 동등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달의 영향을 직접 받는 어업은 물론이고 농경 생활도 계절에 어긋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24 절기를 별도로 두면서까지 음력에 맞추었습니다. 설날, 대보름과 추석 등도 달 중심의 큰 명절이고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서도 정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가 유년 시절입니다. 고향에서도 양력보다 음력을 더 중시했습니다. 이유는 농사 때문입니다.
오늘은 달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맑은 날씨는 아닌듯합니다. 내가 사는 고장은 잠시 구름 사이로 달을 마주할 수 있다는 예상입니다. 지난 추석날에는 달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어렸을 때 고향 마을에서 보았던 달은 따스했습니다. 봄이 다가옴을 예상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춥기는 해도 추석날의 눈에 어린 시린 느낌의 달과는 달리 정감이 더합니다. 잊지 않도록 휴대전화의 알람을 맞춰놓아야 할까요. 무조건 달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올해의 소원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꼭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달님에게 말해봐야겠습니다.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 비는 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정월대보름의 하루가 내 머릿속에는 복잡하게 다가옵니다. 어릴 때를 떠올리니 할 일도 많고 볼일도 많고 생각할 일도 많아 보입니다. 제기차기, 윷놀이, 널뛰기, 투호,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금기 사항입니다. 찬물 마시기, 비린 생선 먹기, 까마귀에게 밥 주기, 아침에 마당 쓸기입니다. 먹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곡밥, 묵은 나물, 귀밝이술, 부럼이 있습니다. 쌀, 조, 수수, 팥, 콩 등 다섯 가지 곡식을 넣어 오곡밥을 지어 하루에 아홉 번을 나눠서 먹기도 하고, 여러 집에서 지은 오곡밥을 모아서 먹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농사가 잘되고, 마을 사람이 모두 건강하리라 믿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가 아침에 귀밝이술을 한 잔씩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요새 세상에 젊은이나 마시는 거지 하고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는 작정했나 봅니다. 빈 몸으로 다니던 그가 배낭을 슬며시 열었습니다. 귓속말로 농담합니다.
“우리 둘만 먹는 거야. 애들이라 술 먹을 줄이나 알아야지”
보온병을 꺼내더니 내용물을 컵에 가득 따라 내 옆에 놓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궁금해합니다.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슬쩍 상 밑으로 감추는 척하더니 차례로 따랐습니다. 귀밝이술은 맑아야 하는데 포도주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맛을 보니 소주에 포도 주스를 섞은 듯합니다. 몇몇 친구가 순해서 마시기에 좋다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진 친구는 한 잔 더 할 사람 누구냐고 신청을 받습니다. 하지만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별 반응이 없자 다시 배낭으로 손이 갑니다. 귀밝이술만 마셔서 되겠느냐며 부럼을 내놓았습니다. 호도입니다. 우리에게 줄 마음으로 시간을 내어 경동시장을 다녀왔답니다. 나는 아침에 부럼도 귀밝이술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예년과는 달리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친구가 준 호두 두 알을 식탁에 내놓았습니다.
“부럼 깨요.”
퇴근한 아들이 와인을 한 병 가지고 왔습니다. 어제 준비해야 하는데 못했다며 늦었지만, 귀를 밝게 하기 위해 한 잔씩 드시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해 전부터 한쪽 귀의 성능이 떨어집니다. 늦은 저녁 정월 대보름날 건강을 위해 아들은 술병을 열고, 아내는 부럼을 내놓았습니다. 슬며시 밖을 내다봅니다. 구름이 낀 듯 아닌 듯합니다. 달맞이,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소원을 남에게 말하면 안 된다지요.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