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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짝사랑은 모과다 20240301

by 지금은

먹지는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바라만 보다가 향기만 맡다/ 충치처럼 꺼멓게 썩어버리는/ 그런 짝사랑이…….

경칩(驚蟄)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집 앞의 모과나무는 철딱서니가 없나 봅니다. 아직도 5성 장군이라도 되는 양 다섯 개의 모과를 달고 있습니다. 첫사랑의 미련이 남아 버릴 수가 없을까요. 9개 중 4개는 우수(雨水)를 며칠 앞두고서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동안 많은 모과나무를 관찰했지만, 올겨울처럼 나무에 모과를 달고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나도 신기하게 여겼지만 내 글을 본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알려주면 구경하겠다고 했습니다.

모과의 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부터 못생긴 게 호박이라지만 그보다 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박은 못났다고 하지만 일상에 유용한 식물입니다. 먹거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름철 애호박이 있고 가을철 늙은 호박은 추운 겨울 따뜻한 음식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모과는 어떻습니까. 약용으로 쓰인다지만 울퉁불퉁 못생긴 주제에 단단하기는 어떻습니까. 딱딱해서 칼로 썰기에 힘이 듭니다. 향기가 좋다고는 해도 장미향도 아니요. 천리향도 아닙니다. 신경을 써서 냄새를 맡고 음미해야 잔잔한 냄새가 납니다. 상하기는 얼마나 빨리 상한지 향이라도 맡을까? 하고 책상 위에 놓았더니만 며칠 가지 못하고 색깔이 변했습니다. 좀 더 지나자 이번에는 아예 검게 변해버렸습니다. 보기 흉하다는 아내의 말에 결국 밖으로 내다 버려야 했습니다.


짝사랑 그렇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풋풋한 열매를 보는 순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직 덜 자라 달걀만 한 게 못생겼다거나 흉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화려하지는 못해도 작고 은은한 희면서도 분홍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든가 가보지 않은 길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만은 아닌가 합니다.


늦가을 떨어진 모과는 이미 까맣게 썩어 흙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발로 밟자 파삭하고 사그라져 흙 위에 흩어졌습니다.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모과는 추운 겨울 얼었다 녹기를 반복합니다. 짝사랑을 못 잊어 하늘을 향해 몸을 말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학생 시절 짝사랑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대?”


궁금증에 물었더니만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말을 빙빙 돌리며 산뜻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조바심에 귀를 끌어당기며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나도 몰라입니다. 초등학교 첫사랑이란 게 눈깔사탕 연애랍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한때는 눈깔사탕이 한 봉지 있었는데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라도 건네며 말했으면 한결 부드러웠을 겁니다. 말을 걸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아서 먼발치에서 빙빙 돌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의 짝사랑은 주먹만 한 모과라고 표현해야겠습니다. 모과 향기가 납니다. 나는 여자고등학교가 가까이 있는 곳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여학교의 교문 앞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내가 이 길을 거슬러 올라갈 때면 무리를 지어 여학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들도 하교하는 중입니다. 동생처럼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가끔 간격을 좁혀 팔짱을 낀 채 나를 토끼몰이하듯 앞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주춤주춤 하는 사이에 어느새 나를 둘러쌌습니다.


“귀엽지 않니, 업어줄까?”


내 붉어진 얼굴에 마음이 가지는지 잠시 눈 맞춤을 합니다. 누나들이 화장했을까요. 모과 냄새가 납니다. 이 중에 언 듯 눈에 들어오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새하얀 교복을 입어 눈이 부셨을까요. 내가 당황하는 가운데서도 마주친 얼굴이 유난히 예뻐 보였습니다. 순간 가슴이 '쿵'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후 나는 하굣길 교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그 누나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는 때도 있었지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말 대신 쪽지를 전하면 어떨지 하는 생각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습니다. 가슴을 졸이며,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바라보면서도 끝내 손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손바닥에 땀이 촉촉해져 종이가 눅눅해졌습니다.


다섯 개의 모과는 추위를 견디며 얼었다 녹기를 반복했습니다. 샛노랗던 껍질이 누르스름하게 변했습니다. 수분이 빠져나가며 덩치도 작아졌습니다. 다른 모과들은 겨울로 접어들며 땅으로 떨어져 검게 변하며 바스러져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까치밥도 아닌 게 모진 추위와 바람을 견디며 봄을 맞이했습니다. 이제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하늘을 향해 따스한 햇살을 맞이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짝사랑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모르는 기다림이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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