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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우편집배원 아저씨 20240305

by 지금은

‘우체부 아저씨, 우편배달부 아저씨’


어린 시절 자주 듣던 말이고 편지 전해주는 아저씨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저씨의 모습은 제복에 순경이 쓰는 정모 모양의 모자를 썼습니다. 큰 가죽가방을 한쪽 어깨에 멨습니다. 편지나 소포를 가방에 넣고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이용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바쁘거나 급한 일이라도 있을 때는 가끔 학교에 들러 주소지에 살고 있는 아이에게 직접 전해주기도 하고 길에서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을 만날 경우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는 관계로 점심을 싸가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가끔 점심 대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편지의 주인은 고마운 마음에 바쁘다는 우체부를 주저앉히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먹을 것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동네에 잔치가 있을 때는 으레 대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같은 고장을 누비고 다니다 보니 동네의 사정에 익숙합니다.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 때로는 10여 년을 지나치는 발길입니다. 자주 보는 얼굴이고 보니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다정하게 지냅니다.


고향의 초등학교 친구 몇몇이 졸업하고 일찍이 서울에 와 살고 있습니다. 1,960대 초이고 보니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살기가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잘살아 보고자 상경을 했지만, 뜻과는 달리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배운 것이 모자라니 자연적으로 힘들고 기피의 대상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실을 무기 삼아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잘한 결과 지금은 모두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관계로 어느새 일선에서 벗어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갑니다.


친구 중에 우체국 집배원으로 정년퇴직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지만 자부심은 아직도 대단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박사로 통했습니다. 몰랐던 사실인데 그에게는 남과 다른 무기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한문에 조회가 깊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문을 배웠습니다. 한글보다 한문이 먼저인 셈입니다. 초등학교 때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읊곤 했는데 나에게는 마이동풍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우체부가 된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졸업을 하고 놀고 있자 서울에 사는 친척 중 한 사람이 직원을 모집하니 와서 시험을 쳐보라고 했답니다. 농사치가 변변치 못해 어려운 살림인지라 입 하나 던다는 심정으로 부모가 서울로 보냈습니다. 또래에 비해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 시험을 본 결과 거뜬히 합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문제입니다. 서류를 제출했는데 자격 미달입니다. 하지만 실력이 아까웠는지 며칠 되지 않아 채용되었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편지의 주소와 성명에는 한자를 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집배원 중에는 한자의 실력이 모자라는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배달 사고가 종종 일어나자, 친구를 수습생으로 근무하게 했습니다. 한자 중에도 특히 어려운 한자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량진(鷺梁津)만 해도 글자가 어렵지 않습니까. 읽을 수는 있어도 정작 써보라고 하면 못쓰거나 고민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시절에는 지금에 비해 한자를 많이 사용했지만, 한글에 비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문 박사라는 호칭을 얻게 되고 다음 해부터는 결근하는 우체부를 대신하여 편지를 배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노량진에서 40년 이상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의 변천 과정을 눈에 담으며 살았습니다.


아내를 만나게 된 사연도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가 친척의 이름과 주소지를 가지고 왔지만, 번지수가 없습니다. 날은 어두워지는데 보따리를 옆구리에 낀 처녀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한 친구가 주인집에 부탁하여 하룻밤을 지내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인연이 되려는지 만남을 이어가다 부부가 되었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호칭이 달라지고 복장도 변했습니다. 편지나 소포를 배달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습니다. 도보에서 자전거로, 이제는 오토바이 또는 택배용 자동차를 사용합니다. 지금은 편지보다 소포나 택배의 물건이 더 많습니다. 편지나 전보에서 전화로 통신수단이 변한 결과입니다. 전자 메일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지막 손 편지를 써본 지가 언제였는지 짐작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치지 못한 손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다.

지난해입니다. 도서관에서 편지 쓰기 에세이 강좌가 있었습니다. 누구에겐가 책을 소개하는 편지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 헤어진 다정했던 친구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발간된 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집배원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연애편지를 쓴 거냐고 했습니다. 그만큼 함께 한 수강생들의 말처럼 서정성이 담겨있는 뜻입니다. 편지를 수없이 만진 전문가다운 말입니다.


“노량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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