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을 다녀왔다.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미국 땅 밟아보기. 꼭 어디를 방문해보고 싶다는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땅을 밟아보는 것에 무게를 두었었지. 언제쯤 가보나 싶던 차에 기회가 닿아 짧은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자의 설렘으로 머무는 시간 동안 충분히 만끽했다. 그걸 경험해 보다니 참으로 새로웠다. 맨해튼의 활기, 센트럴 파크의 평화, 보스턴의 따뜻한 햇살과 여유.
나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선진국, 힘, 부의 상징, 불평등의 나라라는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나보다 앞선 이들에게는 조국 독립의 꿈을 이루거나 먹고살기 위한 기회의 땅으로 기억될 것이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었고, 그분들 덕분에 현재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불편함 없이 방문할 수 있었겠지.) 한 달 여가 지난 지금 그때를 기억하니, 그곳에서의 멋과 낭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하나 더. 매우 강렬하다고 해야 할까. 강렬하다는 느낌은 낯선 나라에서 오는 이질적인 풍경과 사물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 상당히 강렬했다. 내가 본 그들은 여행자이거나 본토 사람들이거나 알 수는 없었으나 패션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행동까지 당당함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이다.
걷다가 마주치는 거리의 사람들,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쩜 이 사람들은 당당할까였다. 그 당당함은 ‘무식한 게 당당하다’는 느낌이 아니고 자기의 의사표현을 주저함 없이 확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있어 본인의 생각을 주저함 없이 표현하는 행동이 처음에는 ‘개성적이다’, ‘자유롭다’는 느낌으로 다가왔고 더 나아가서는 ‘다양성을 존중해 준다’는 인식까지 이어진 것이다. 말이 통하진 않았고 내가 본모습이 단편적인 부분일지언정 눈빛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그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와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고 형성된 성향 탓일까?
눈치껏 살아야 했고 눈치가 있어야 어떤 조직에서든 적어도 싫은 소리는 듣지 않는 우리 사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눈칫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대가 바뀌어서 예전보다는 의사표현이 중요해지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가고 있지만 이것이 정말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건지, 세대 간 간극을 방치하는 결과인지 모를 그 애매함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느꼈던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 뚜렷한 색깔로 각인되었다.
나의 삶은 정도라고 생각하는 네모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맞춰 행동해야 하거나 다양성, 창의성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사고에 기반했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면 상당히 불편해했고, 은연중 타인에게도 강요했을 게 뻔하다. 이러한 내 성향은 무의식 중에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줬을 것이다. 또한 안정적인 의사결정을 추구하는 직업적 영향으로 인해 앞으로는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배운 생물다양성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가 생각난다. 지속가능한 이용을 도모하여 미래세대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나부터도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다양하게 생각하기.
의사표현은 애매하지 않고 확실하게 하기.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