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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May 15. 2020

13. 달빛 아래 두 사람 하나의 그림자

산에 오르는 길은 어둡고 조용했다. 다행히 험한 등산이 아니라, 차가 오가는 널따란 길에 완만한 경사였기에 짐을 들고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산을 오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우리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규칙적으로 걷는 우리의 발소리만 들릴뿐, 세상은 고요했다. 


20분 남짓 걸었을까, 그가 나에게 선곡을 요청했다. 두 시간 동안 짐을 들고 산에 올라가는데, 내내 말하는 것도 힘들고, 너무 적막하다보니 BGM을 틀어놓자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성시경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성시경을 좋아해서 평소에 그의 노래를 많이 듣는데, 지금 우리 둘만 있으니 둘이서 듣기 적절한 노래인 것 같았다. 바로 노래를 재생했다.



지친 하루가 가고 달빛 아래 두 사람 하나의 그림자
눈 감으면 잡힐 듯 아련한 행복이 아직 저기 있는데
상처 입은 마음은 너의 꿈마저 그늘을 드리워도
기억해줘 아프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걸

때로는 이 길이 멀게만 보여도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흘러도
모든일이 추억이 될 때까지 우리 두 사람 서로의 쉴 곳이 되어주리

(성시경 두 사람 feat. 지니뮤직)

 



그냥 그와 함께 듣고 싶어서 재생한 것이었는데, 첫 마디 가사부터 지금 이 상황과 너무 적절히 어울렸다. 하루 종일 걸려 여기까지 온 지친 하루, 그리고 우리를 비추는 달빛이 머리 위로 보이고, 그 아래 우리 둘은 나란히 걷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마음이 있고, 아직 그걸 완벽하게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다. 


몇 천 번을, 혹은 그 이상을 들은 노래였는데, 가사를 이렇게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노래 가사가 상황에 꼭 맞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이 노래를 처음 듣는 상황이었고, 한 곡을 다 들었을 때는 미리 준비한 선곡이냐며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아직도 이 장면은 눈에 선하다. 어두운 산길, 유일하게 우리의 길을 비추는 것은 달빛,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발 소리, 그리고 그 적막을, 낯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음악.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내 발로 내 미래를 바꾸러 가는 발걸음과 같았다. 저 위에 올랐을 때, 우리 사이는 과연 변할까.



그날의 달빛. 거친 느낌이지만.  ⓒ과거 사진첩








그렇게 두 시간여가 지나고, 우리는 드디어 간월재 데크에 도착했다. 이미 사람은 많았다. 그 넓은 데크에 텐트 하나 칠 자리가 없어보일 정도였다. 연휴라서, 그리고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쯤..) 사람이 많을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 틈새에서 빈 자리를 찾아,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텐트를 쳤다. 정말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딱 두 사람 누우면 여유 공간이 없을 미니 텐트. 데크 위라 말뚝은 못 박고, 사방으로 짐들과 가방을 두어, 나름 고정을 시켰다. 일단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을지, 산 위에서 보는 풍경은 어떤지. 


한 쪽에 산 정상을 향해 가는 계단 및 돌 길이 보였다. 일단 높은 곳에 가보자며 우리는 짐을 두고 몸만 빠져 나와서 그 길을 올랐다. 휴대폰 플래시로 발 밑을 비춰가며, 언덕을 오르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눈 앞에 언양 야경이 펼쳐졌다. 와아. 산 위에서 보는 바로 앞 도시 야경은 예뻤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뒤로하고 올라온 언덕 위라 주변은 조용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벤치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았다. 




눈 앞에 펼쳐진 야경  ⓒ과거 사진첩




올라오는 동안 하던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 친구가 뭐라고 했다고?"

"자연스럽게 팔 같은거 붙잡으라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남자가 하는 행동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그래서 아까 휴게소에서 사람 많아 정신 없을 때, 너 쫓아 가느라 잡긴 잡아야 하는데 차마 팔은 못 잡고, 팔꿈치에 옷자락을 잡았던 거야."

"아~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잡을게."


그는 나란히 앉아서, 나의 손을 잡았다

처음 잡은 그의 손. 따뜻하다.


"지금까지 신중했던 만큼, 앞으로는 잘 할게. 헷갈리게 하지 않을게."

"어? 어?? 잠깐만. 이거 고백인거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도 일어났다. 


"응, 나는 너랑 만나는게, 연애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그 이상도 생각하고 있어."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고는 대화가 끊겼다. 너무 조용해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세상에, 내가 얘랑 키스라니. 상상하다가 포기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려 하다니!




나는 지금 꼭 키스를 해야 하냐며 멀어지려 했지만, 그는 나를 당겨 그의 품에 안았다. 그리고 굳건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래, 키스를 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연인이 되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사실 친구랑 다름이 없다고. 나는 그가 고백하자마자 이렇게 바로 키스까지 돌진할 줄은 몰랐었기에, 몹시 당황하고, 몹시 긴장하고, 몹시 떨렸다. 



한참을 망설였던 것 같다. 그의 얼굴은 가까이 다가오다가 멈춰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내밀었다가, 뒤로 뺐다가, 고개를 저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갈피를 못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어깨를 두르고 있는 단단한 팔은, 지금 키스를 하지 않으면 나를 풀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것이라면, 

그래 지금 하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키스. 



첫키스의 종소리 같은 건 없다. 내 머리와 심장에는 100개의 태풍이 동시에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토록 뛰던 심장은 이미 터진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해졌고, 마침내 그 키스가 끝났을 때에는 그를 꼭 끌어 안았다.








우리가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역사를 이루는 동안, 날씨는 급변했다. 달과 별은 어디로 가고, 구름과 안개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안개가 가득한 건 처음이었다. 바로 맞은편 텐트도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게다가 바람은 또 어찌나 부는지. 


손을 잡고 다시 텐트로 돌아가는 동안에, 하늘에 낀 구름은 물론이거니와 데크에, 또 산 아래까지 낀 안개를 보며, 오늘은 별 보는 날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리가 서로에게 집중하라고 하늘이 이렇게 변했나보다라고 하였다.(산을 오르기 전에는 분명 날씨가 맑았다!) 텐트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바람이 너무 불어 네 모서리에 얹어 놓은 짐들도 소용 없이 텐트가 들썩이고 있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 몸으로 텐트를 고정시켰다.


그렇게, 밤 새. 우리는 그 텐트 안에 있었다. 



밤 새 산을 덮은 안개. 왼쪽 사진에 데크 크기를 보면, 얼마나 코앞까지 안개가 왔었는지 알 수 있다. ⓒ과거 사진첩




※ 현재는 텐트를 치는 간월재 비박(백패킹)은 불가하다고 합니다. (단속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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