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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May 09. 2020

12.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9월 초쯤 어느 날, 그에게 제안을 하나 하였다.



간월재에서 별 보고 싶은데, 같이 갈래?


날짜는 10월 3일.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이자, 금요일이어서 금, 토, 일 딱 놀러 가기 좋은 연휴. 3일 출발, 4일 컴백하는 1박 2일 관측(일요일은 쉬기). 오랜만에 먼 곳으로 가서 바람도 쐬고 별도 보자는 것이었다. 그때는 사실 가볍게 꺼낸 얘기였다. 오랜만에 별이 보고 싶었고, 항상 그와 다녔기에 그에게 1순위로 얘기를 한 것이다. 이 날이 D-DAY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는 별 보러 가자는 말에 거절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 모두가 그에게 맑은 날 별 보러 가자고 하면, 그는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2학기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던 어느 날, 별 보러 가자는 내 말에 신촌까지 와서 무작정 기차를 타고 임진각으로 떠났고(나는 당시 휴학 중, 그는 시험 중이었다), 그가 취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별 보러 가자는 다른 친구의 말에 당시 여자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별을 보러 갔다 '헤어져!'를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여친은 그가 별 보러 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물론 며칠 뒤 다시 만났다고 한다.)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그는 분명 같이 갈 것이라 생각했고, 역시나 그는 수락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마음이었다. 정말 순수하게 별을 보고 싶었다. 지난 울산 여행에서 갈 곳을 탐색하다가 발견하였는데, 그때는 일정 및 거리 때문에 포기하였지만 계속 마음속에서 미련이 남았다. 너른 억새 능선이 펼쳐져 풍경도 좋고, 산 위라 별 도 잘 보이고, 데크가 있어 텐트 치고 비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얼추 환경도 괜찮을 것 같았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그에게 얘기를 꺼낸 것이다.


간월재 억새 평원 ⓒ구글 검색



사실 처음에 그는 망설였다. 간월재는 정말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근처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 능선이 간월재인데, 거기까지 텐트 및 촬영할 장비들을 갖고 가려면 차가 필요했다. 그 말은 곧, 인천에서 출발, 서울에서 나를 픽업하여 운전해서 울산까지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의 부모님 몰래 갈 것이므로 울산에서 차를 빌리는 경우의 수는 제외) 그리고 그 짐들을 갖고 약 두어 시간 코스의 등산도 해야 했기에, 그는 꼭 거기까지 가야 하느냐며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나의 성격 덕에, 나는 거길 가고 싶어 너에게 얘기를 꺼낸 것이라며 우긴 결과, 내가 이겼다.








그렇게 여행 준비는 찬찬히 해 나가는데, 그가 고백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9월은 인내의 시간이었다.(썸을 3달째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의 행동에서 마음은 느껴지는데, 입으로는 아무런 확신도 주지 않았다. 나 또한 자존심에, 그리고 그가 고백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스스로의 고집에, 아무 말 않고 그의 행동을 모두 받아주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는데 속은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순식간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 마음을 보면, 빨리 사귀기로 하고, 간월재는 손 잡고 가야 할 거 같은데. 



생각해보면, 그때 나누었던 대화들에 그의 걱정이 한 껏 녹아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웃기게도 우린 그때, 서로 돈을 얼마나 모았는지, 앞으로 삶의 계획은 무엇인지, 부모님이 사윗감/며느리 고르는 기준은 어떤지 이런 대화를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월급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하다가, 매달 얼마나 저축을 하고 있는지 얘기하고, 이만큼 돈을 모으는 이유는 이러한 인생 플랜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어졌었다. 사실 나는 당시에 그가 들으면 마음 편할 멘트만 골라서 했다. 물론 사실에 기반하여. 그는 본인의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을 고민했다. 나는 그의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질문을 받으면, 자, 이 정도면 확신을 가져도 되지 않겠니? 의 느낌을 듬뿍 담으며 대답을 했다. 집이 잘 살고 못 살고는 중요치 않다, 나 역시 부자가 아니다. 우리 부모님 또한 물질적인 것을 기준에 두고 있지 않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말이 될 때까지도, 그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선비 같이 고고하던 그의 눈빛이 나를 보고 흔들리는 것까지 느꼈는데도 (이때 완벽하게 확신했다. 그리고 남은 건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오래걸리긴 했지만), 심지어 내가 울산 여행 사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그와 뭉크전 나들이 인증샷을 남길 때 일부러 내가 그에게 기대서 사진을 찍었는데도! (그동안 전시회를 같이 다니면서 이 정도로 붙어서 사진 찍은 적이 없다.)




왼쪽은 그로부터 4년 전에 찍었던, 보통의 우리.  오른쪽은 그날 찍었던 보통의 우리. 그나마 전보다 조금 더 붙었다.  ⓒ과거 사진첩
그 날. 내가 일부러 도전했던 모험적 포즈의 사진. 그는 절대 먼저 붙지 않는다. ⓒ과거 사진첩




그래, 내가 말만 안 꺼냈다 뿐이지, 나는 분명 할 만큼 했다. 열심히 판을 잘 깔아놨다 생각했는데, 조금 지쳤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속의 D-DAY를 간월재 가는 날로 잡았다. 같이 밤을 새우는데, 이 날 마저도 그냥 지나가면 정말 너랑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다. 학창 시절, 최소 3번 이상은 단 둘이 밤을 지새웠지만 아무 일도 없었기에, 이번에도 그때와 같으면 우리는 진정한 친구 사이다. 이 날이 정말 마지막이다. 이게 마지막 판이될 것이다.








드디어 D-DAY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 차를 운전해서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리의 일정은, 강남 모처에서 텐트를 픽업한 뒤, 간월재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어시간을 올라 간월재에 도착하여, 별을 보는 것이었다. 이 날, 걱정 없이 차를 쓰기 위해 그는 아예 아버지를 해외로 보내버렸다...ㅇ_ㅇ (명분은 얼마 전까지 아버지께서 중국에서 근무를 하셨어서, 2박 3일 쉬는 동안 동료들 보러 다녀오시라는 거였다.)


분명 오전 8시쯤 집에서 출발한 것 같은데, 9시쯤 강남에서 텐트를 픽업하고, 서울을 빠져나가니 12시가 넘었다. 생각한 일정은, 늦은 점심으로 언양불고기를 먹고 해 떨어지기 전에 산을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12시가 넘어서도 아직 서울 근처였다. 날씨 좋고, 3일 연휴에, 나들이 차량들이 몰려 차가 어마 무시하게 막힌 것이다. 나중에 자차를 갖게 되면서 깨달았는데, 주말에 장거리를 뛰려면 최소 9시 이전에는 서울을 빠져나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뚜벅이였기에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처음에 생각한 일정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곳이 도로 위든 어디든 지금 우리 둘만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을. 둘이서 멀리 떠난 다는 사실에 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주 신나서 들떠 있었다. 도로가 막히면 늦게 도착하는 거지. 어차피 우리는 밤에 별을 볼 것이니 낮 일정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일단 이 시간을 즐기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휴게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왠지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아 빵과 우유 등 밤새 허기를 달랠 간식거리를 샀다. 나는 배탈이 잘 나지만, 화장실을 몹시 가리는 사람이었기에, 일부러 먹는 것을 자제했다. 산속에서 중요한 순간에 배를 움켜쥐면 안 되지 암암.



핫도그 방향에는 함정이 있다. 그렇다 이것은 완벽한 설정샷이다. 미래를 위한 ⓒ과거 사진첩



무려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세상에 도로가 아무리 막힌다 하여도, 진짜 간월재 아래까지 도착하는데 이 정도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서울 집에서 오전 8시쯤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오후 8시다. 이미 해는 졌다. 차에서 내려 짐을 챙기면서, 하늘을 보는데 날이 아주 맑았다. 산 아래라 나무들로 시야가 가렸지만, 별이 아주 잘 보였다. 올라가면 환상적인 하늘이 펼쳐질 것 같았다. 오길 잘했어. 오랜만에 별빛 좀 쬐자.  


텐트와 카메라, 삼각대 등 장비를 들고,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산 위에 올랐을 때, 우리를 비추는 풍경이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지 못한 채. 나는 별을 봐서 신나는 마음 반, 그와 함께 밤을 지새운 다는 것에 떨리는 마음 반으로 두근두근거렸다. 과연 그는 어떻게 고백할까, 혹시나 이벤트 같은 걸 준비했을까, 아니면 고백 안 하는 건 아닐까. 지금 이렇게 좋은데,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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