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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May 03. 2020

11. 오랜 친구가 연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고비

고백해본적 없는 남자에게 고백받기

9월이 되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의 사이는 변화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 사이. 특히 비오는 날의 나홀로 우산은 나를 더 없이 차분하게 했다. 그가 나를 밀어낸 적은 없지만, 나는 밀려났다. 이게 밀당이라면 나는 그대로 밀려 저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였다. 당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9월에도 매주 꾸준히 만났다. 그의 자상한 행동 또한 다름이 없었다. 우산을 같이 쓰지 않은 것만 빼면. 친구네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고, 한강에 모여 나들이를 하는 등 둘만 만난 것은 아니지만 동기들 다같이 모여 놀았다.


친구들은 인내심이 깊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뭔가 있는데, 아무 변화가 없는 우리가 슬슬 논란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스물 아홉, 한창 이십대였던 우리는 만날 때마다 연애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얘기를 하다보면 꼭 말미에는 그와 나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결국, 한 친구네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던 날. '10년 커플'의 남자인 친구가 폭발했다.



그냥 결혼해라 너네. 사귀는 것도 건너뛰어.


갑자기 너무 대놓고 한 얘기였던 데다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둘 다 동시에 벙쪄서 친구를 쳐다봤다. 이미 10년이나 장수하고 있는 커플의 눈에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한심해 보였나보다. 그 친구의 표정이 '뭘 그렇게 질질 끌고 있어!' 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질질 끄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오랫 동안 매우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연애란 설레고 좋은 것이지만, 그 연애가 잘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10년 지기 베스트 프렌드를 잃을 수도 있고, 다같이 친구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주변 지인들과도 어색해 질 수 있었다. 우리가 같이 참여하고 있는 모임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만났다가 헤어질 상황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친구인 게 나았다.



하지만 과연, 

그냥 친한 친구라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만났다가 헤어진 뒤의 여파를 생각하면, 지금 친구인게 낫다지만, 그렇다면 지금 친구 사이는 과연 영원할까? 지금이 좋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각자 연애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뒤에도 친구 사이가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자주 보고, 서로 챙기고, 연락을 자주 하는 이런 친구 사이가 그때도 유지가 된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불륜의 전초 아닌가!) 이런 것들은 연인이 되는 과정에서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과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면 더 이상 이 친구와는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친구 사이는 곧 지금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사이는 어떻게든 변할 수밖에 없다.



ⓒ과거 사진첩



이맘 때 쯤, 한 친구와 연애에 관해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연애 이야기였는데, 그 친구의 고민은 회사 동기 오빠와 사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거였다. 이미 둘의 마음은 확인한 상태였다.(적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는 나보다는 나았다.) 다만,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은 이미 입사 초기 동기와 사귀었다가 헤어졌는데, 또 다른 동기와 사귀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서로 동기가 겹치는 상황인지라 이별에 대한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 내가 했던 말은, 이미 지금 둘 사이는 그냥 동기가 아니다.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귀거나, 이대로 사귀지 않거나 인데, 만약 사귀지 않는다면 친한 동기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헤어진 후의 상태나 다름 없으니, 지금 너의 마음이 그가 좋다면 일단 사귀어 보이는 것은 어떨까. 잘 되어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은 것이고, 그게 아니라 헤어진다고 해도 그건 지금 안 만나고 헤어지는 것과 똑같은 결과일 것이다. 나 같으면 질러보겠다. 적어도 너는 그 오빠가 너를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고, 너도 지금 그 오빠가 좋으니 나보다는 낫지 않겠니 T^T.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그와 나 사이 또한, 변화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지금 변하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대로 친구 사이를 유지한다는 것이 곧, 상대방이 다른 이성을 만나도 괜찮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사이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내 마음을 확신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오면 나는 주저없이 그 변화를 택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끝끝내 변화를 택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의 과거 연애는 두 번. 첫사랑은 군대 가기 직전에 있었고, 두 번째는 제대할 때 즈음이었다. 첫 연애는 자연스럽게 깊어져 따로 고백이랄 것이 없었으며, 두 번째 연애에서는 여자친구가 먼저 고백했다 하였다. 그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고백을 주제로 얘기가 나올 때, 나는 여자에게 고백해본적이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물론 함정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아서가 아니라, 여자가 다가올 때까지도 그가 적극적이지 않아서였다. 보통의 남자들이 여자, 연애에 대해 가지는 적극적인 행동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와 만나려면, 그가 나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하지 않았던 것을 해야, 사귀고 나서도 그의 마음가짐이 이전 연애와는 다를 것 같았다. 나를 대하는 감정도 그래야 다를 것 같았다. 나는 이 것을 기준으로 삼고 절대 내가 먼저 고백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또한, 나는 자존심 또는 고집이랄까, 내가 절대 먼저 고백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엄청 세다. 요즘은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하기도 하고, 프로포즈를 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그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나의 지난 연애는 내가 먼저 고백한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한 상대는 짝사랑으로 끝났으며(티 내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좋다고 한 사람들 중에서 연애를 했다. 나는 사랑을 받는 것을 좋아해서, 내가 퍼주는 것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절대 먼저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키는 그에게 달렸다. 만약 그가 변화가 두려워 나에게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계속 친구 사이를 유지하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이다. 나는 다시 소개팅을 열심히 할 것이고,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겠지. 만약 그게 괜찮다면 그는 나를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은 것이고, 그렇다면 이 고민도 의미 없는 것이다. 지금껏 좋아하는 이성을 위해 먼저 행동해 본 적 없는 그가 스스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연애를 시작하면, 이 연애가 무사히 결혼까지 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움직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판을 깔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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