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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리 Apr 24. 2020

10. 결정적 아님의 이유

확신이 아님으로 변해가는 심리 상태

그 날은 아리랑 4,5,6권을 빌리기 위해 만난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에게 스탠드를 선물 받은 후, 아리랑 1,2,3권을 빌려 매일 저녁마다 책을 읽었고, 순식간에 다 읽어 또 4,5,6권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열심히 읽어야 자주 볼 이유가 있다.


그 날은 비가 왔다. 하루 종일 온 것은 아니고, 맑았다가 잠깐 소나기처럼 비가 내렸다가 그치는. 여름의 비오는 날씨였다. 우리는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만났고, 카페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연남동 어딘가 유명한 카페를 또 내가 찾아놨던 것 같다. 꽤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비가 쏟아졌다. 나는 항상 가방에 우산을 넣어 다니기에 우산이 있었고, 그는 카메라와 책만 갖고 있었다. 급한김에 내 작은 우산을 펼쳤고, 아주 좁은 공간에 서로 책과 카메라를 우선으로 하고 머리만 우겨넣으며 바로 근처 아무데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이 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대화를 할 때마다 신기했던 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부분에서 가치관도 비슷하고, 식성도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 취향마저도 비슷했다. 하지만 오늘의 포인트는 이 대화가 아니다. 이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두어시간 쯤 지났을까, 이제 슬슬 가려고 보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좀 더 기다리면 빗줄기는 좀 약해지겠지만 바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집에 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 같이 우산 쓰고 지하철역까지 가자고 했다. 우산은 나에게 있었고, 지하철역은 여기서 50m 남짓 그리 멀지 않았고, 나의 집으로 가는 동선이 지하철역을 지나 가야 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쯤되면 같이 우산쓰고, 슬쩍 스킨십을 하는 등의 진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썸이라면 슬슬 진도가 나가야지. 썸이 맞다면.



그런데 그는 거절했다.



굳이 내 우산을 쓰고 밖에 나가 옆에 있는 마트에서 새 우산을 사왔다. 나는 그때부터 패닉이 왔다. 아, 지금까지 좋았던 것은 뭐지? 다 내 착각이었나? 썸도 아니었나? 그게 아니라 지금 나랑은 손끝하나도 닿기 싫다는 건가. 지하철역이 눈에 보이는데 그 짧은 거리마저도 옆에 있기 싫은건가. 그냥 친절한 사람이니까 나한테도 그정도로 해준건데 내가 착각해오고 있었던 건가. 생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는 말리기까지 했다. 고작 요 몇 걸음 가자고 우산을 새로 사냐고.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나랑 같이 우산 쓰는게 싫으냐고. 그랬더니 그냥 우산은 같이 쓰는게 아니라며 굳이 우산을 사왔다.


그렇게 나란히 각자 우산을 쓰고, 그를 지하철에서 배웅하고,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돌아오는 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느덧 비도 그쳤다. 나는 넋놓고 연남동을 걷고 있었고, 그는 인천에 도착해서는, 비가 그쳐 노을이 멋지다며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는 하늘이 멋있다고 감탄하는데, 나는 그래 나 버리고 그렇게 가니 좋더냐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충격은 지속되었다. 그 전까지는 우리는 썸을 타는 것이고, 그 사이가 아주 더디지만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보다. 모든 것을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최근의 추억부터 곱씹어 보면서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에게 어떤 의도가 없었던 것인지 되짚어봤다.


그렇게 최근의 울산 여행을 다시 생각해보던 중, 그렇게 그때 찍었던 사진들을 찬찬히 보던 중. 그 전에도 몇 번을 봤던 사진이지만, 새로운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은 그림 찾기. 주제는 그와 나 사이.




찾으셨나요?



정답은 빨간 동그라미 속에  ⓒ과거 사진첩


바로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는 나에게 어떠한 터치도 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팔을 뒤로 두었다. 아, 깨달음이 왔다. 그는 나와 스킨십을 하기 싫구나. 나와는 닿는 것도 싫구나. 친구와 연인의 가장 큰 차이가 스킨십인데,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스킨십이 없으면 그냥 친구일뿐인데. 우리가 발전하려면 무언가 터치의 썸이 필요한데. 그는 그냥 친구였는데, 나만 착각하고 있었구나.



이때 만나는 사람마다 상담을 하며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한 친구가 있는데, 저에게 굉장히 잘해줘요. 특히 최근에는, 회식하거나 야근하거나 하면서 늦으면 제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자고 확인하고요. 갖고 싶은게 있으면 선물해주고요. 만나면 항상 가방도 들어주고요. 마실 것도 챙겨줘요. 혼자 해외여행 가면 항상 선물을 사와요.

그런데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 어떤 터치가 없어요. 보통 이정도면 어깨에 손을 얹거나 아니면 포즈라도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이거 보면 완전 절대 너에게 닿지 않겠다 잖아요.

이 남자 마음은 뭘까요?


사람들 반응은 반반이었다. 특히 남자들은 사진을 저렇게 해서 찍을 정도면 아닌 거 같다고 입을 모았다. 분명,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에게는 허튼 친절을 베풀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도 사진을 보면서는 말을 줄였다. 이상하다...



연애란, 오가는 마음으로 그리고 살짝씩 스치는 스킨십으로 점점 서로에 대한 호감을 높여가는 상태에서, 사귀자고 하는 것이 정점을 찍고 본격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 나로서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맥락에서 느껴지는 마음들이 있었기에, 이제 조금씩 스킨십을 한다면 마음이 있다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산을 같이 쓰면서 어깨를 스친다든지, 사진을 찍으며 어깨에 손을 올린다든지 하는 것은 절호의 기회들이라 생각했다. 서로 닿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작의 단계랄까. 그렇게 스치고 닿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연인으로 발전하는데 있어 긍정적인 신호탄인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은 아니겠지만 그동안의 연애에서, 몇 번의 썸들에서, 주변의 수많은 경험담에서는 그랬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는 정해인이 같이 우산 쓰려고 굳이 우산을 구해와서 어깨를 감싸며 걷는데, 이건 무어란 말인가. 몇 년 후에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이 날이 생각났다. 내 기대 속에 이 날은, 그가 정해인처럼 할 것이라 생각했던 날이었다.



비극으로 치닫는 머릿속에서, 나름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노력을 했다. 남자의 친절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래.. 스킨십에 조심스러운 남자일거야.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니 그런 걸거야. 아주 선을 긋는 남자일 수도 있지. 아, 그런데 진짜 그런 남자가 있긴 한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차마 그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변화를 의미했기에. 그 변화를 이런 질문으로 만들 수는 없었기에. 그저 나는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나를 희망고문하는 것은 싫었기에 항상 보수적으로 생각한다.)


그에게 지금의 나는

잠깐의 우산도 같이 쓰기 싫은 여자, 사진을 찍을 때 닿기도 싫은 여자.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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