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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Mar 26. 2024

서교동 오후 세 시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십니까

날씨 좋은 삼 월의 한복판에서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십니까.


굽은 허리 다리를 재촉하시며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십니까.


그 허리는 어쩌다 굽으셨습니까.

다리는 또 어쩌다 굽으셨습니까.


한 마디 한 마디 꺼내기 힘겨운 그 할아버지

눈빛만은 초롱 하게 이야기를 꺼내신다.


[내 아들의 짐을 얹었다네.

태어날 때 하나,

학교 다닐 때 하나,

군에 입대할 때 하나,

결혼할 때 하나.

그러다 보니 머리는 겨울 눈의 색깔이 되고,

걸음걸음이 무거워지고,

허리는 나를 지탱하기 버거워한다네.]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의 삶만 살아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초롱 하게 빛나는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할아버지 고개를 젓는다.


[이 짐들은 한 번도 내게 무거운 적이 없었다네.

태어날 때 들었던 아들의 울음소리,

처음으로 나를 보며 웃었던 웃음소리,

처음으로 나를 아빠라 불렀던 목소리,

처음으로 내게 반항했을 때의 그 표정,

처음으로 삶의 무게를 느꼈을 때의 표정,

처음으로 지친 모습을 보이며 내 앞에서 울었을 때의 표정,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나의 품을 떠날 때의 표정.


이것들이 어찌 내게 짐이 될 수 있었겠나.

더 많이 들어주지 못하여 미안한 것을.

내 아들이 어찌 내게 짐이 될 수 있었겠나.

영원히 사랑하며 대신 짐을 들 수 없게 되는 것이


오히려 안타깝네.


야속한 것은 나의 허리를 굽게 만든 지난 세월이 아닌,

이제 나를 데려갈 수밖에 없는 시간의 손짓이라네.


이제 나는 가네. 이제 나는 가네.

아마 언젠가 자네도 나를 이해하겠지.]


오묘한 웃음으로 가던 길을 마저 가던 할아버지.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웠습니다.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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