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동안, 안녕.
키보드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 전부 지운다.
무슨 생각을 내가 하고 있을까, 어떤 것을 적어야 할까 한 자 두 자 적다 다시 전부 지운다.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적어야 할까, 무엇을 말해야 할까. 이미 적은 이야기들을 다시 되뇌고 싶지 않기에 새로운 것을 찾다가 결국 전부 지운다.
너무 많은 감정들을 이곳에 적었다. 당장 이 생을 끝내버리겠다는 글부터 사랑 이야기, '나'라는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이곳에 담았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불특정다수 앞에서 나체로 서 있는 부끄러운 감정도 느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적었을까, 내가 말해야 할 것들을 다 말했을까. 아직 더 남은 것 같은데, 더 글을 적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삶 가장 깊은 곳 그 어딘가 묻어둔 수치스러운 이야기들을 적나라하게 적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말보다는 글이 더 편한 나이기에, 해야 할 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 기분. 비유하자면 이미 이별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연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이별의 말을 하지 못하는 기분과 비슷한 것 같다. 물론 나는 대부분 그 '통보'를 당하는 입장이었다.
통장에 단 돈 만원 밖에 없기에 담배를 아껴 피워야 하지만 나오지 않는 글 앞에서는 그저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 댈 뿐이다. 허공을 바라보다, 먼지 쌓인 기타를 바라보다, 그리다 만 그림이 있는 아이패드를 바라보다, 한숨을 쉰다. 이 느낌이 고갈되어 버린 느낌인 건가. 그토록 사랑하던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다. 너무나 사랑했던 활자와 단어들에게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당한 것 같다.
영감이라는 것은, 이야기라는 것은 참 이기적이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은 나의 가슴 아주 깊은 곳 어디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생각을 지배하고, 내가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단어를 하나하나 주워 담아 문장이라는 것을 적게 하고, 그 문장은 모여 하나의 글이 되어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세상에 인사를 하게 된다. 그러다 그들이 '나'라는 존재에게 싫증을 느끼게 될 때, 사라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그대들은 나의 삶 속에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다. 그저 메모장에 휘갈겨둔 생각의 편린들만이 남아 아주 가끔 나에게 인사를 건넬 때, 전 애인의 물건을 우연히 방 안에 발견한 미련 있는 전 남자친구처럼 잠시동안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잠시 쉬어야겠다. 잠시 채워야겠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만나야겠다.
아주 가끔은 나와 나의 이야기, 단 둘이 마주 앉아 쌓여왔던 오해를 푸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너무 바빠서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한마디 건네야겠다.
처음부터 글을 적는 것을 사랑했으나, 지난 일 년 여의 시간 동안 어쩌면 의무적으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 가는 와중, 나의 이야기가 나에게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나의 영감이라는 것이 나에게 상처를 받아 숨어버린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러니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더 많은 이야기를 채워오겠다. 더 많은 삶을 살아내고, 그 조각들을 이 공간에 풀어놓겠다.
그러니, 누군가 나의 글을 기다려왔다면 그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인사를 건넨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
다시 활자를 이곳에 적어놓겠다.
그때까지 모두 평안하기를. 매 순간은 그럴 수 없더라도 몇 번의 순간만큼은 찬란하고 평안하기를.
따스한 봄에 꽃 내음 가득한 주말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몇 번의 밤을 웃으며 보낼 수 있기를.
함께 맞이하는 아침 가운데 웃음만이 가득하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내자. 우리 모두 살아내자.
삶은 살아낼 때 아름다우니.
살아내는 순간, 그 모든 시간, 분, 초가 아름다우니, 그 파도의 끝에서 다시금 활자로 인사를 건넬 수 있기를.
잠시동안,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