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부른 이름이 아니라, 침범하는 그대를.

by TheGrace

별일 없는 크리스마스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운동을 가고, 잠시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 들어와 음악을 듣고, 게임을 조금 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음악을 듣는다. 듣고, 듣고, 들었다.

잠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눈물 한 줄기가 턱 하고 흘러내린다.


이상하다. 그저 다를 것 없는 크리스마스였고, 크리스마스에 함께보다 혼자였던 적이 더 많았는데, 왜 오늘따라 눈물이 한 방울 튀어나올까. 뜬금없이 말이다.


그래, 아마 나는 외로웠을까. 너무 많은 일이 있던 올 한 해였다. 죽음을 생각했고, 죽음을 추구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삶의 밑바닥까지 다녀왔다. 존재론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방에서 홀로 벨트로 매듭을 지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돈이 없어 밥을 굶었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돈 때문에.

먹고살아야 해서 공사장에 나갔다. 3월부터 9월까지. 매일같이 인력 사무소를 통해 일을 나가고, 비가 오던, 날이 덥건, 그저 묵묵히 짐을 옮기고 땅을 파고, 무엇인가를 만들고 부수었다.


감사하게 지금은 직장을 잡고 일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자리를 잡고 삶을 일구어 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저 현장 반장님들께 밥을 빌어먹는 인생이, 회사 대표에게 밥을 빌어먹는 인생으로 바뀌었을 뿐,

아직 나는 주체로서의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였음을 깨닫는다.


근사해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내가 지금까지, 서른이 되도록 하지 못했던 노력을 누군가는 했을 것이고, 그는 그 노력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근사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참하지는 않아야 하는데, 나는 나의 부모님보다 충분히 좋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비참하고 비루하게 실패해 버린 예술가. 그 사람이 나이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것들로 그 유명한 예술가처럼 살고 벌고 싶었는데, 수 천의 빚 말고는 나에게 남은 것은 없다. 아, 매일 해명해야 하는 몸에 담긴 수 십 개의 그림들까지.


후회하지는 않지만 과거를 긍정하진 않는다.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만 나의 과거가 지금의 비루한 나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과거를 긍정할 수 없다. 비참한 사실이지만 어떠한가. 그다지 올곧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치열하게만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는 여러 추억과 행복한 기억들은,

혼란의 시간들을 건너면서 실수로 뚜껑을 열어버린 필름 카메라처럼 전부 초점이 나가고 흐릿해졌다.


분명 뜨거웠는데,

전부를 바칠만한 사랑도 나에게 있었던 것 같았는데 왜 이제는 또렷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 기억들 속에 정말 사랑이 있었던 걸까, 나는 사랑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여기서 나에게 질문이 하나 생긴다.

사랑은 무엇일까. 그저 남녀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 그 전부일까. 프로이트는 그렇게 이야기하겠지만, 그로 인해서 모든 불행과 아픔이 탄생했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등을 맞대는 것이겠다.

세상은 전쟁이다. 삶은 고통이며 전쟁이다.

그럼에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카뮈는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물음을 던졌는데,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자살하지 않기 위하여 사랑을 찾고 있다.


이 대답을 하고 나서야 큰 숨을 들이키며 찬찬히 숨을 고른다.


어차피 사람은 태어났기에 죽는다.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태어났기에 죽어야 하고,

젊은 시절이 있었기에 무기력한 노년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불친절한 세상 앞에서

찾아오는 부조리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카뮈는 이 담론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자살]이라는 키워드를 꺼낸 것이겠지.


그러나 사랑은 그 부조리 가운데에서도 사람에게 살 이유를 준다.

그래서 나에게 사랑은 등을 맞대는 것이다. 각자 눈앞에 놓인 부조리와 시련은 맞서 싸울 수 있다. 어떻게든 맞설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전쟁사가 이야기해 주듯이,

등 뒤에서 닥쳐오는 공격은 대처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병법들이 적의 뒤를 돌아 기습하는 많은 방법들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애용되는 방법이다.


현시대에도 동일하리라.


삶의 위기는 뒤통수에서 찾아온다.

머리를 흠칫 서게 하는, 살결에 닿는 냉기와 살기는 항상 실체보다 한 걸음 더 먼저 머리 뒤로 다가온다.

단순히 배신 같은 단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위기와 모멸과 공포는 머리 뒤에서 찾아오기 마련이다.

생각지 못한 위기와 절망은 술래잡기에 능숙한 어린아이처럼,

등 뒤에서 한참을 숨 죽이고 있다가, 내가 웃고 있을 그때에 뒤통수를 때린다.


모든 위기는 시야의 밖에서 서서히 시야의 안쪽을 향해 전진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켜야 한다.


등을 맞대고 서 있는 것은 서약이다. 내가 그대와 함께 있겠노라는 서약이다.

시지프는 끝없이 돌을 산 꼭대기로 굴려야 했고, 그 돌은 다시금 반대편으로 굴러 내려간다.

영원의 형벌이며 부조리한 현실의 거울이다.


그러나 사랑은 각자가 언덕의 한 편에 자리하고 있어, 그 돌이 굴러 내려가지 않게 등으로 돌의 무게를 감당하며 정상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부조리와 영원한 형벌에 저항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한다.

모두가 모두의 경쟁자이며, 서로를 죽이지 못하여 날이 서 있는 현시대를 저항하는 수단이 사랑이겠다.


그래, 그러니 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 단순히 외로움이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는 단순한 메아리가 아니라, 삶의 공명을 함께 만들어내며, 지금 우리가 여기 있노라 소리치는 사랑을 하고 싶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내는 공명의 아름다움을 손을 맞잡고 들어보고 싶다.

사람들의 소음과 공해는 지나쳐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공명을 들어보고 싶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카뮈의 반항보다 훨씬 숭고한 그런 사랑 말이다.


눈 내리는 설산에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발자국일지라도 한 걸음씩 소중이 찍어가는 그런 사랑 말이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각자의 굳은살로서 더욱 능숙히 서로의 삶을 지켜내는 그런 사랑 말이다.


나의 외로움은 누군가를 부르지만, 불러서 도착한 이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다.


나의 외로움이 부르는 소리와는 관계없이, 그저 나의 삶에 침범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굳게 닫힌 문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문을 열고 나의 삶에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그런 침범은 어쩌면 나는 환영할 수도 있겠다.

규칙보다는 다정함과 상냥함으로 포근히 바싹 마른빨래 향을 풍기는 그런 포옹이었으면 좋겠다.

질책과 훈계와 비웃음 대신에, 분명하게 따뜻한 목소리로 서로의 지친 삶을 향해 위로의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그런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감히 지친 누군가의 삶에 들어와 손을 잡아 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나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문을 잠글 때, 그대여, 들어오라.

닫힌 삶으로 들어오라. 닫힌 삶 가운데 들어오라.


함께 열린 결말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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