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아니라, 질문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by TheGrace

성경에서 예수께서는 설교하실 때 설교의 포문을 이렇게 여신 적이 있었다.


마태복음 11장 16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그 당시 세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비유로써 말씀하셨다. 나는 그분만큼 지혜롭지 못하여 비유로서 표현하진 못하지만, 지금 세대를 단 한 단어로써 표현하자면 이 단어를 쓰고 싶다. "혐오".


그래, 이 시대는 혐오의 시대이다.

모두가 분노한다. 시대 전체가 혐오로 뒤덮여있다.

정치적인 옳고 그름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거나 어떠한 사회적인 대립에 대하여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시대는 모두가 서로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한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의 허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진대, 자신의 허물은 기를 쓰고 감추면서,

다른 이의 허물을 들추고, 또 누군가 들춰낸 타인의 혐오를 끝까지 조롱하고,

돌을 던지고, 죽기를 바라는 듯이 공격한다.


인류 역사상 한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디스토피아 소설에 나오는 암울한 세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백 퍼센트 옳다거나, 백 퍼센트 틀렸다거나 말할 수는 없으리라.


뻔한 양비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서로 미워하지 말아요." 같은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차라리 서로를 미워하더라도 그 미움과 대립이 부딪혀 발생하는 불꽃으로서 이전의 역사처럼 인류가 발전하였다면 아마 조금 덜했겠지.


인류의 발전은 수많은 전쟁과 대립으로서 만들어진 불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니까.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그저 혐오를 위한 혐오를 자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첨예한 의견의 대립이나 사상과 가치관의 충돌로서 이 시대의 철학이 발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은 치열히 발전하지만, 도덕은 그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감히 말하건대,

인류의 미래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암울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서로의 입의 재갈을 물리려고 한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 다 옳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누군가의 의견은 당연히 틀린 것이고, 자신의 의견은 전부 다 맞다고 믿어버린다.

누군가의 사랑은 조롱의 대상이 되며, 누군가의 희생은 멍청한 짓이 되어버린다.


내가 SNS를 보는 것이 지극히 피로하다고 느꼈던 시점이 바로 이 현상들을 알아챘을 때부터이다.


그래서 조금 더 이 피로함에 대한 사유를 확장해 보려 한다.


카뮈가 이야기한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은 어떤 이에게는 축복이요, 어떤 이에게는 지옥이겠다. 모두가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렇다면,


삶은 삶이라는 것 그 자체로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우리 모두는

우리는 결국 하나의 대답을 선택해야만 한다.


아마 많은 이들이 "아니다"라고 대답하겠지.

만일 그렇다면,


"없다"라고 이야기한 수많은 자들은 추가로 하나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없다면, 자살하는 것이 옳은가?


이 질문에 우리는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종교적인 이유를 벗어나서, 저항해야 한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은 곧 삶의 부조리에 동의하며

나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삶을 살아내며, 다른 실존하는 것에 대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않고,

그저 삶을 실존하는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주시하며 끝까지 반항하는 것.


무의미함의 극치라고 이야기하는 삶일지라도 그 삶을 사랑하도록 발버둥 치는 것.

카뮈는 그 삶이야말로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카뮈는 이 말을 남겼다.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무의미한 삶 가운데 이 시대는 부조리함에 저항하고 있는가?"라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이 시대는 저항하고 있지 않다.


이 시대는 삶을 실존하는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며,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

이미 혀로, 손가락으로 누군가의 수많은 삶을 끊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손가락과 혀는, 각자의 목을 조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삶은 단순히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의 반복이 아니다.

자아를 가지고 현 세계 안에 내던진 현존재는, 모두 질문해야만 한다.

질문하지 않고 내뱉는 혐오는 그저 배설물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는 왜 이 세계 가운데 던져졌는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이 삶의 무의미 속에서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모두가 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내고, 영원한 시계는 계속해서 초침을 돌려대는데,

우리가 던져진 이 세계 가운데에서 현존재로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이 세계에 던져야 하는가?

질문해야만 한다.


혐오가 아니라,

질문 말이다.


그 질문은 여러 가지 대답을 낳을 것이다. 존재라는 것에 대하여 흐릿한 윤곽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랑을 찾게 할 수도 있다.


그저 외로운 한 객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서,

사랑이라는 형체 없는 열기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며,

그의 산물인 자신과 똑 닮은 현존재를 다시금 품에 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친절한 세상은 아마 영원히 우리에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중에도.


아마 창조주만이 알고 있는 정답이지 않을까.


정답을 모르는 삶이 의미가 없는 삶인가? 전혀. 오히려 정답을 모르기에 각자의 선택과 각자의 투쟁과 각자의 반항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각자가 사유하는 그 사유가 내린 땅에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가 친 가지에서 새로운 생각과 흐릿하게 정답에 가까운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들, 질문하는 사람들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무언가(無言歌)가 지루한 세계를 풍성히 만들어주지 않을까.


선택해야만 한다.

혐오로 만들어낸 핏자국을 온 천지에 남기고 떠날 것인가.


혹은 이 부조리함 가운데에서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이 아닌,

돌덩이를 산 꼭대기로 계속, 계속 밀어 올리며 부조리에 반항할 것인가.


어느 선택이건 책임은 각자 객체를 넘어 모두의 어깨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대여, 그러니 나 자신이여, 우리 최선의 선택을 하자.


삶은 그 실존하는 삶 자체로 부딪혀 볼만한 존재 아니겠는가. 그러니 꿋꿋이 주시하라.


꿋꿋이 어깨에 힘을 실어 돌을 밀어 올리라.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이면 어떠한가.

잠시 내려가며 맛보는 풍경이 그 보상이 되리라.


각자에게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닌, 우리 그 각자의 돌을 힘 있게 굴리자.


그래,

그것이 삶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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