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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Nov 23. 2020

영화 ‘내가 죽던 날’ 내 맘대로 보기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고 클로징 크레딧이 흐르는 사이, 어두운 불빛에 뼈만 남은 빈 의자들에 몸뚱이가 보였다. 사고 기능이 마비된 듯 영화에 빠져있던 방향감각이 현실로 돌아서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그녀들처럼 그곳으로 떠난다면, 제왕절개로 아이를 꺼내듯 억지로 가둬둔 나를 꺼내 첫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연의 계곡 사이에 부는 바람처럼,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의 입에서 새 나는 소리가 힘겹게 말이 되었다.


“인생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어”


그 말이 머리에 와 박힌 듯, 오랜 시간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잠결에도, 걷는 걸음마다 그 말이 곁을 따라다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루하다 생각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고 책임져야 할 오늘을 내던지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날들도 아니었다. 고민되며 불편하고 갈등하던 것들이 순천댁의 언어로 토해진 것이다. 인생, 지나고 보면 잠깐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사는 날이 참 긴 날들인 것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바라본 창밖 넘어 하늘엔 영화 속, 순천댁의 쓸쓸한 미소가 회색빛 구름에 가려진 태양처럼 번지고 있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추리물의 외양을 썼지만 정말 여성들이 꼭 봤으면 하는, 여성을 위한, 여성의 영화가 아니었을까 한다.


영화를 소개하자면,

「태풍이 몰아치던 밤, 외딴섬 절벽 끝에서 유서 한 장만을 남긴 채 소녀가 사라진다. 오랜 공백 이후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는 범죄 사건의 주요 증인이었던 소녀의 실종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소녀의 보호를 담당하던 전직 형사, 연락이 두절된 가족, 그리고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마을 주민 ‘순천댁’을 만나 그녀의 행적을 추적해 나가던 '현수'는 소녀가 홀로 감내했을 고통에 가슴 아파한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는 소녀에게 점점 더 몰두하게 된 ‘현수’는 사건 이면에 감춰진 진실 앞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데…」


결국 현수는, 세진을 통해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왜? 절벽이었을까?

영화는 절벽 끝에서 시작해 절벽 위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때론 절벽 위에 선 삶과 같다는 것을 알아채기 바라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어쩌면 절벽 끝으로 밀려난 세 여자의 삶을 통해 견뎌내고 살아내기를 바라는 작가의 간절한 응원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된다.


다들 세진을 걱정하는 듯하지만 겉도는 관심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왜 죽음을 선택하게 됐는지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없었다.


절벽 위에 서 있기는 현수도 마찬가지다. 변호사인 남편을 두고 직장에서 잘 나가던 현수는, 세진처럼 자신에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다른 여자가 있던 남편은 이혼을 하기 위해 현수를 바람피운 여자로 몰아갔고, 결국 맞서기 버거웠던 그녀는 유치원 버스와 충돌사고를 내, 한쪽 팔의 마비증세로 휴직을 하게 된다.


아빠의 범죄 사실이 담긴 장부를 경찰에 직접 전달하고 보호받는다는 명목 아래 섬마을에 고립된 세진과 남편의 새로운 사랑에 밀려 절망과 체념의 늪으로 빠진 현수는 모두, 세상 끝으로 내몰린 것이다.


별을 따라가고 있었다.

영화는 세진이 붙여둔 스티커 별을 따라 현수가 늪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는, 위로를 받아야 할 곳에서 더 많이 상처를 받은, 위기의 여자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는 불씨의 길이었는지 모른다.


정말 사랑했을까? 질문을 던지는 날이 있다. 그랬을 것이다. 단지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이 때론 배탈에 설사를 동반하게 되었을 뿐이다.


쉽게들 사랑은 움직인다느니, 부부는 의리로 산다느니 말들을 내뱉지만, 정작 그 말이 자신의 체념을 담은 슬픔에 언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주변의 말림에도 세진을 뒤쫓던 현수는, 누구에 의할 것 없이 스스로 세상 끝으로 밀려나 체념 속으로 빠져든 자신을 발견하며 세진의 죽음을 통해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알아줬음 바라는 현수처럼, 그 단 한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 우린 흔들린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럴까 싶어 사랑을 하지만, 의도와 다르게 커다란 상처가 되는 것도 사랑이었다.


문득, 내 상처에 아파 무심코 내뱉은 말들이 상대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어 아파졌을까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지지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자살이나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어디에서도 그 한 사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사는 것 같다.


섬마을 주민 벙어리 순천댁!

작가는 묵묵히 고된 삶을 살아가는 순천댁을 통해 대신 위로의 말을 토한다.


“밥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네가 널 구해야지.”


그녀에 하루가, 겨우겨우 살아가는 세월에 마른 눈물이 떨어진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 삶을 닮은 전신마비 조카의 이름을 세진에게 내어줘 세상을 향하게 한다. 세진이 그 긴 세월을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쩌면 그녀가, 전신마비의 조카를 그렇게라도 꿈꾸는 세상에 내던져주고 싶은 마음도 숨어들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세진, 현수, 순천댁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내몰린 여자들을 세상 속으로 끌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멈칫멈칫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 가 어둠의 늪지로 숨어든 여자들에게 용기를 내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죽을 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지도, 용기를 내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하였을 것이다.



현수의 복직을 위해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날,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대신 세진과 함께 절벽 위의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건강한 세진의 모습에 겹치는 미래의 그녀 모습에 웃는다. 변하는 게 세상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게 나였다는 것을 우린 너무 뒤늦게 알아채는 것 같다.


‘김혜수’란 배우가 참 예쁘다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의미를 미소 하나로 함축시킨 그녀, 사랑하기로 했다.


요즘도 동물원으로 가면 공작새가 꼬리를 펼치는 장면을 볼 수 있지 모르겠다. 인생에서도 기다리는 어느 순간  공작새처럼 그렇게 꼬리를 활짝 펼치는 시간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날은 돌아서기보다 힘껏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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