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서로의 사정에 밝은 언니와 영화 한 편을 보고 헤어지기 아쉬워 자리를 더 해 마신 술은, 여러 날 깊이 잠들지 못해 누적된 피로를 말끔히 씻겨내주었다.
그러니 뭐라 해도 사람이 좋은가 보다. 술만 의지해 잠들었다면 그리 마음 가볍게 잠들지 못했을 거란 확신은 몇 번의 불면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사실이었다.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고 삶이 여전히 힘들다는 언니에게 어디선가 들은, 이해도 분명치 않은 전생을 들먹여,
"언닌, 전생의 죗값이 저 보다 많은가 봐요" 했다.
뱉고 보니 그럴 것도 같은,
조명에 온도를 더해 서로를 반영해주고 나니 형량을 한 일 년쯤 감량받은 듯 잠시라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거였다.
그렇게,
별처럼 많은 말들을 쏟아내도 집중해 들어주고 자신의 색을 덧입혀 속내를 보여줘 서툰 답이라도 위안이 되어줄 수 있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힘이 아닐까 싶어 진다.
그러하니 밤하늘에 예쁜 꼬리를 남기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만나는 순간처럼 아름다운 그 여정을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비에 젖은 꽃들의 색이 짙어지고 물빛에 젖은 가로등 불빛의 거리를, 말없는 사내처럼 가을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뜻하지 않게 언니와의 술자리가 이 여름을 떠나보내는 별리의 자리가 된 것이다.
변화롭지않은 날들은 없듯이 다시 맑아진 가을날, 바싹 마르지 않아 꿉꿉하던 빨래를 기분 좋게 바람에 널고, 뽀독뽀독 말라가는 수건처럼 가볍게 산책길에 나선다.
며칠 내린 비에 떨어진, 겨우 까까머리를 벗어난 섣부른 밥 송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한가함이 바쁘다는 이유로 잠시 미뤄두었던 생각들을 끌어온다.
참, 사람 마음 어렵다.
살만큼 살았다 싶은데도 매번 봄날을 기다리며 매달리듯 발버둥 치며, 여전히 벌어지는 일들에 고민하며 때론 밤잠을 설치 기도하니 말이다.
고백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겁쟁이가 되었다. 흔한 말로 갱년기라 그렇다며 핑곗거리를 들이밀지만, 분명 젊은 날에는 생각지 못한 것들이 무서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답지 않게도,
어떠한 노년을 맞이 할지? 주변의 힘겨운 사건들이 내게 벌어지면 어쩌지 하는 등 별, 별 불안이 생각을 더 해 때론, 잠들지 못하는 밤을 만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정말, 정말 잠깐 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한순간 시간이 뭉텅이로 잘려나간 들녘에 멍하니 홀로 서있는 그런 기분이다.
듣기 좋은 소리로야 보편적인 삶이 다 그렇다 하지만, 정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뾰족한 쇠꼬챙이와 철망으로 막혀 앉을 곳 없어 배회하는 비둘기처럼, 마음 설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럴 때, 어디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사람을 찾게 되나 보다. 푸념이라도 쏟아낼, 그러나 도시의 지나친 불빛이 또는 오염으로 두터워진 밤하늘이 반짝이는 별빛은커녕, 탄성을 자아낼 별똥별 하나 내어주려 않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젠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마음을 다독이자고 겉돌던 말들이 아물어 가는 상처의 끝자리에 맺힌 핏빛처럼, 깊숙이 다가와 박히는 순간이 있다.
과거는 소용없고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으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카르페디엠’,
그러나 언젠가는 모두 죽고 말 테니 죽음 또한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가 그렇다.
멀지 않은 시간이지만,
무서움을 모르고 객기가 낭만이라 생각하며 살았던 시절이 있다. 그땐 그저 멋으로 식상해하며 어리석어 받아들이지 못했던 말들이 어느 날 문득 하나, 하나 특별한 의미로 되살아났다. 그러다 또다시 되돌이표의 고민들,
사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나 갖게 되는, 정상적인 불안이다. 통제 가능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나의 이성과 잡념은 헤어진 연인처럼 서로 외면하고 있으니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해 힘겨워지는 것이다.
얼마만큼 바람이 지나쳐야 저 밤나무처럼 무심히 서있을 수 있을까? 묻고 싶어 지는 이유다.
참으로 얄궂게도 내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언제나 그 자리에 꽃피어 열매 맺고 또 추운 겨울을 버텨내 다시 피고 지고 내어주는 삶에 거스름 없는 밤나무.
순간적으로, 조던B. 피터슨의‘ 열두 가지 인생의 법칙이란’ 책에 제2의 법칙처럼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는 규칙을 지킬 수 있다면, 모 가수의 노랫말처럼 ‘오늘보다 조금 나은 내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스친다.
여럿의 어우러진 사람들이 지나쳐 갔다. 오고 가는 말속에 속내를 털어놓아 고민거리가 해결될지, 아니면 너도 나와 같은 형편에 위로를 받을지 모르는 길이다. 아직 여름인 듯 빛 쏟아지는 이 길을, 사색보단 알록달록한 기쁨으로 물드는 그들의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 쏟아낸다.
바쁘다고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랑에도 그랬다. 하루하루 죗값을 치러내며 살아가듯 의미를 두려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또 누군가 같은 마음으로 메아리가 되어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