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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Sep 20. 2021

집으로 가는 길

저녁의 시간이 하품하듯 다가왔네요.

붓의 첫 획처럼 어둡고 두텁게 또는 종잡을 수 없지만 그제야 숨이 트이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오후 일곱 시쯤이 그런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어찌 되었든 복작거리던 낮은 저물고 낡은 스웨터의 실을 풀어헤치듯 사나움도 다 빠진, 앓이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시간입니다.


힘들었던 하루를 어떻게든 풀어내려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하려 하기도, 없던 날개펼쳐 최대한 빠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기도 한, 그도 저도 아닌 사람에겐 외로움의 시간 되겠지요.


명절 연휴 전이라 모두가 서둘러 퇴근한 빈 사무실에서 보던 시집을 다 읽고, 지독한 시인의 사랑 때문에 숨 가빴던 지난 며칠을,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아 써걱거리며 가슴으로 들고나는 바람문을 닫아걸으며 집으로 가는 길에 보내야 할 우편물을 집어 듭니다.


이십여 년을 그렇게 기억되던 자리, 문방구 옆으로 가면 언제나 묵묵히 서 있어 보내야 할 우편물들을 집어삼켜주던 빨간 우체통이 보이지 않습니다. 멍하니, 무언가 잃어버린 것은 분명한데 허탈함은 엄살 한 번 부리려 하지 않네요.


웬걸,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가 어쩔 줄 몰라 선택하는 길이 직선이듯, 길을 이어갑니다


지나는 길에 마주친, 낮은 담 넘어 반평도 되지 않는 빈터에 널린 몇 벌의 빨래가 히죽 웃습니다. 꽤 늦은 시간이 되어야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지만, 명절을 맞이해 고향으로 가는 기차 시간에 늦어 잊힌 빨래였음 해 지네요.


삼키려다 목에 걸린 알약 같은 골목길입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게 지난 시간은 미화되어 미움은 잊히고 아름다운 기억만 남는다지요. 가난해도 참 행복했던, 다 지난 시절이 거기 있네요.


주체 못 할 여유가 뒷짐 진 노인처럼 걸음을 더디게 합니다. 기웃기웃하는 비닐장판에 쌓인 평상도, 담 넘는 꽃향기도 정겹습니다. 어디든 모여들어 사람 속에 스며들 수 있겠지만 어째 여럿의 불편함보다 점 점 홀로의 이런 시간이 익숙하고 편안해집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자주 찾는 헌책방에서 커피 한 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겠네요. 노란 조명 불빛 아래 작은 탁자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왜 그리 행복한지,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 떠난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날 때도 이 시간입니다. 압생트의 중독 때문에 그러하다지만 그의 노란색에만 들어있는 슬프도록 푸른빛은 꼭 이때 마시는 커피의 맛과 같을 거라 상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도 따사로움이 그리워 노란색을 좋아하지만 또 불편함은 거북했던 사람인가 봅니다.


헌책방을 좋아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마음이 닿았던 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는 사람과 커피 한 잔 마시는 착각이 들기도 하지요. 오늘은 책의 첫 장에 쓰인,

한때는 누군가의 가슴을 설레어 빨갛게 달궜을 사랑을 엿보게 되네요.


‘........

날씨는 많이 싸늘해졌지만

언제나 늘~~ 너의 마음은

나로 인해서 항상 따스한 봄날이었으면 좋겠다’는


가루약처럼 하얗게 부서진 슬픔이 잔여 통증을 마비시킵니다. 밤새워 울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을 말하거나 받아들였을 그네들이었을까요?

아니면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물고기처 뻐끔뻐끔 쏟아냈을까요?

갑자기 삼십 대의 그들이 오십 대의 우리가 되었을 때, 아님 더 편안하게 늙어갔을 때 그 추억은 어떠할지 궁금해집니다.


지금쯤은 가끔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을지?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을지?

이별의 이유가 소화되지 않는 가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니면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들에게 인사를 던지고 싶어 지네요.

"안녕, 그대들이 견뎌내야 할 하루! "


거리를 걷습니다.

어딘가에 아직 고개 숙인 빨간 우체통이 남아 있겠지요? 누구에게나 그런 우체통이 남아있어 마음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될까 합니다. 잡채도 하고 전도 부치고. 이것저것 준비해 몇 날을 따뜻하게 보내야겠지요.


모두 따스하고 편안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명절 연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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