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잠 깨어난 새벽, 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아직 가을이라 단정 짓기에는 이른,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또 다른 계절이라 생각을 했는데, 확연히 이제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아야 할 가을이 맞다 싶네요.
이래저래 들끓던 시끄러움도 잦아드는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차분히 물들어가는 가을빛처럼, 나 또한 그리 물들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됩니다.
이용객보다 직원이 더 많다 싶을 정도로 한산한 공항에서 독일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고 돌아온 날, 그리 생각해 그러하겠지만 풀 죽어 물끄러미 바라보는 냥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딸 없는 집이 텅 빈 세상 같아, 딸 없이 어찌 혼자 저 놈을 외롭지 않게 돌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딸 없이 살아갈 날들의 허전함이 울음 속에 담겨 있었나 봅니다.
딸에 대한 사랑은 조금 이상하지만, 넉넉지 않은 조모의 손에 성장하며 형성된 부족한 엄마의 여러 부분이 딸의 성장을 지켜보며 조금씩 역행하는 과정에서 더 각별해진 것 같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 엄마의 편의를 위해 한동안 사용할 세제며 휴지, 졸업식에 입을 남동생 양복까지 준비해주고 떠난 딸이니 다른 것들은 오죽 잘했을까요? 초로의 여성이 젊은 세대들의 맛집에 앉아 여유롭게 그들의 문화에 뒤섞일 수 있던 것도 딸에게 입은 특혜 중 하나겠지요.
딸과의 이야기에 고양이를 빼놓을 수는 없겠네요.
콩이(고양이 이름)와 한 가족이 된 게 벌써 햇수로 만 4년째가 되네요. 시월의 어느 날 집 앞 공원에서 아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기 고양이를 데려 왔습니다. 사람살이도 벅찬데 고양이까지 어찌 키울까 싶어 반대를 하고 싶었지만, 멀지 않은 겨울이, 무엇보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온 후 몇 날 뒤의 꿈에, 태몽처럼 생생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쫓아내도 천연덕스럽게 들어앉던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생각나, 인연이라 생각되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많은 염려와 달리 콩이와 함께 살게 된 후, 정말 모든 것은 웃음이 되었습니다. 만약 누군가와, 특히 자녀와 거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맞이해보라 권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화가 나도 대화의 물꼬를 틀 콩이가 있었고, 콩이를 위해 웬만한 것들은 서로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밥벌이에 바쁘다는 이유로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들이, 챙기지 못해 섭섭했던 것들이 콩이를 사이에 두고 자연스레 이야기로 풀어졌습니다. 아마 콩이를 돌보며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한 사정도 벌어지는 게 사람살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겠지요.
무엇보다 커다란 변화는 나 자신 일 것입니다. 우선 목소리에 콧바람을 집어넣게 되었습니다. 남사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해 애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선머슴 같은 제가 “넹, 넹” 거리며 쉽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게 되었습니다. 콩이와 연습이 되어 그런지?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나가서도 새는 바가지가 되었습니다. 좀 과장되지만 그러다 보니 회색의 거리가 다양한 색으로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네요.
콩이 덕분에 사는 날이 점, 점 단순해지고 너그러워져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혹여 마음 다칠까 두려워, 시작도 하기 전 철벽부터 쌓고 보던 관계도 듬성듬성 나무판으로 대충 둘러친 울타리로 변해 버리고 말았네요.
그렇게 알게 모르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는 콩이를 두고 서로 조금 더 사랑받고 있다고 아웅다웅한 딸이 집을 비웠으니 그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라진 누나를 보고 싶어 하는, 말 못 하는 콩이의 마음을 지레짐작하여 마음이 아픈 건지, 아이처럼 아웅다웅하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못해 그러한 것인지? 어느 것이든 맘이 여간 아픈 게 아니네요.
살아가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하게 될까요? 그중 힘겹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유독 가슴 저린 이별의 상처 하나쯤 누구든 안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별스럽게 각별한 딸과의 헤어짐을 갖고 보니 일상에 묻혀, 그게 이별의 순간인 줄도 모르고 보낸 시간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낸 오늘이, 그 속에 함께한 사람들이 새삼 고맙고 또 고마워집니다.
어찌하든 스스로 아파봐야 타인에 상처도 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사람에 일이란 걸 이렇게 배우게 되나 봅니다.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부분들에 참 미안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별도 있나 싶은, 페이지를 하다 보니 구독자와의 이별도 갖게 됩니다.
그녀는 생각만 해도 괜스레 마음이 아파지는 독자였습니다. 햇빛 내리쬐는 거리를 피해 잠시 카페에 들어앉았을 때, 보이는 여럿의 뒷모습에 그녀가 떠올라 더러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했지요.
'평안할지?'
사실 이런 공간을 이용해 하고픈 얘기를 이렇게 풀어가고, 또 그 얘기에 이웃이 되어 토닥여주는 독자님이 계시다 는 건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저에겐 힘이 되는 일이 독자님께는 모자람으로 부끄러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녀의 댓글에 가장 먼저 댓글을 달고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혹시 위로의 말이라 건네며 어떤 상처를 보태지 않을까 두려워 쓰다 지우다, 지우다 결국 표정 하나 달고 맙니다. 저의 그 마음을 독자님들의 마음에 비춰보게 되는 이유지요.
결국, 사람 사는 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참 많다는 거겠지요? 정작 하고픈 말은 가슴에 담아두고 또 그런 마음을 알아채면 불편해할까 염려스러워 한걸음 뒤로 물러서게도 되는, 하지만 살다 보면 또 살아지는 날들이라는 윗 세대들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하게 되는 것이, 딸과 떨어져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마음도 주고받는 톡으로 거리감을 좁혀가며 자리를 잡아가게 되네요.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임을 알아채고 너무 애달파 말라는 순리겠지요.
가끔 다른 사람의 하루가 궁금해집니다. 시간이 꽤나 더디게 흘러간다 느껴질 때지요. 함께 해 머무는 시간의 지루함을 잊게 해던 딸의 빈자리가 도드라져 보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엉뚱한 곳에서 우연하게 출구를 찾게도 되네요.
평소 즐겨 듣는 음악(들국화의 ‘걱정 말아요 그대’)인데, 듣다 보니 새삼스레 처음 듣는 듯 가사 한 줄이 다가옵니다.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어둠처럼 그리움 스며들까 해 켜 두었던 전등을, 마음속 잡음을 지우듯 하나씩 꺼내려갑니다. 투명한 새벽빛이 잔잔하게 변한 것 없는 듯 낯익은 일상을 시작하려 하네요. 같은 날임에도 매일매일 적응하려 애쓰지만 막상 새로움을 찾아야겠단 생각을 하지 못했었네요. 이별 후, 또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최선을 다해봐야겠습니다.
무엇이 어떻다 해도 참 살아가기 좋은 세상입니다. 독일에서도 인터넷 쇼핑으로 딸이 엄마의 주전부리를 주문해 보내주네요. 제가 그런 딸을 갖고 있어 무엇에나 감사한 사람이란 것을 자랑삼고 싶네요.
이제 그만 비가 그쳤으며 좋겠습니다. 마음도 우울을 걷어들이고 맑은 가을날이 되어 모두 햇빛에 노랗게 물드는 아름다운 하루하루가 되었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