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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Nov 28. 2021

그녀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중간한,

사실 그 말만큼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 어떤 말보다 어울리는 말, 어중간함이지요.    


도회적이지 못하면서 순박해 보이지도 않는, 출입문에 비추는 무표정한 얼굴에 흠칫 놀라고 맙니다. 언젠가 무심결에 훔쳐본 부모의 얼굴에서, 그새 참 많이도 늙으셨네 하며 들던 생각이, 그 늙어가던 부모의 모습이 그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많이도 닮아갑니다. 부모와는 좀 다르게 살고 싶었지만 별 차이 없이 늙어가는, 세심하게 살펴보면야 분명 다름이 있었겠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사는 게 다 그게 그건가 보네'라는 말로 퉁치고 싶어 집니다.    


해 질 녘이면 까닭 모를 슬픔에 젖어들 듯 부모님 생각은 언제나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합니다.    


지금의 그녀 나이쯤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그런 남편 대신 돈을 남편으로 섬겼던 어머니, 덕분에 어린 그녀는 조모의 손에 맡겨져 성장하게 되었지요. 아비의 흠 탓이었을까요? 동네 분들은 어린 그녀를 이름보다 명환이 딸년으로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었지요.  

  

그녀의 고향은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꽃피는 산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화로운 도시의 어디쯤도 아닌,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황톳길을 시멘트로 뒤덮고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을 빨갛고 파랗게 페인트로 덧칠해 색을 입혀가는, 어중간하게 변하고 있는 시골 마을이었지요.    


아마 고향에 대한 애착이 그리 크지 않은 건 그만큼 결여된 부분이 많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의 이면에는 늦은 여름날 피기 시작한 신작로 가의 무성한 코스모스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씹어먹던 시리도록 하얀 아카시아 꽃, 모내기 반찬으로 만들어 내 가던 가마솥에 볶은 까만 콩이나 밀가루가 뭉쳐 작은 덩이가 씹히던 호박죽 등, 시골살이에서나 누릴 수 있던 것들로 아직도 선명하고 아름답게 그리운 것들로 남아있지요.    


또한 멍석을 깔고 누워 바라본 한 여름밤의 은하수는 어린 그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알 수 없는 그리움 속으로 빨려 들게 하였었는지? 그 별들을 보러 가야지, 보러 가야지 하며 벌써 몇십 년이 훌쩍 흘러가 버렸네요.    


그토록 선명하고 아름답다 단정 지을 수 있는 것들을 과연, 우리는 인생에서 얼마나 만날 수 있었을까요?    


나이를 먹어가며 생각도 변해간다지만 떠오르는 지난날은 여전히 조금 우울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잘살아 내지 못했다거나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설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적당량이다 싶을 만큼 집어던지는 한 움큼의 굵은소금처럼 때론, 삶에 간을 맞추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밤, 독일에 간 딸과 반시간 가량 통화를 하다 보니 유독, 지난날을 많이 되돌아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러다 보니 살아가는 날에 내려놓기에는 아쉽고 미련이 남는 것들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제하기 나름이라지만, 혹여 이랬으면 하는 것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솔직히 그리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아쉬워 후회가 밀려들기도 합니다.


사람 참 어중간하지요?    


제 자리를 찾아 제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딸을 눈여겨보며 그녀도 마음 따라 발길을 옮겨놓는 일이 많아집니다.   


살아내며 가장 서글펐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하며 떠오르는 자문에 아마도 기본에 중요성을 간과한, 가정에서 자연스레 배워지는 것들을 그냥 지나친, 기본 틀에 빈약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오랜 물음에 해답을 얻게도 됩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의 지론을 빌리지 않아도, 원만한 가정에서의 건강한 성장이 얼마큼 중요한 일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토대가 되어 밟고 선 그 바닥의 불완전성이 그 위에 구축하는 것들을 위협하는 바람으로 얼마큼 작용을 하였는지? 최고의 판매량을 자랑삼는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일에 한몫 거들며 일조하게 되는, 모두의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이겠지요?    


유년으로 들어선 길에는 그리움이 궁금증으로 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환이 딸년과 비교되며 이장집 따님으로 불리던 친구는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윗집에 점순이 언니는? 주렁주렁 얼굴들이 궁금증으로 늘어섭니다.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노랫말이 앞서는 어느 여름날, 규방 마님처럼 살고 있을 줄 알았던 이장집 따님은 시간의 무서움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잠결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맞부딪친 세파에 많이 변해 있었지요.    


어찌 보면 장거리 여정에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리고, 단단한 뼈대로 남은 경험에 다시 살을 붙여야 할  시기에, 우리가 도래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발길이 가보지 않은 길 앞에 멈춰 섭니다. 무작정 걸어가자니 그 길이 불안합니다. 그 길에 도움이 될까 싶어 주섬주섬, 여태껏 챙겨둔 것들을 둘러보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고쳐 쓸 것은 고쳐, 새로운 다짐으로 남은 여정을 준비해야 되려나 봅니다.    


노년으로 가는 길도 성장의 길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입니다. 이참에 그동안 여러모로 형편이 되지 않아 미뤄두었던 배움이나 취미활동을 그 길에 동무 삼아야 할까 봅니다.    


최근, 지금은 육십 대 후반이신 어느 작가님이 젊은 날에 쓰신 글을 읽으며 행복감에 빠져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독서를 좋은 동무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그에 맞는 시간이 있듯이, 그때에 가능했을 작가의 풋풋한 사랑 얘기는 그때의 그녀가 아니기에 다시 맛볼 수 없는 추억의 음식처럼, 기억의 맛으로 다가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건강 챙김 보다 우선일 수는 없겠지요.    


수의에 주머니가 없듯이 아무리 맛난 음식도 집어넣을 수 있는 위의 크기에 부딪치고, 멋진 옷이 아무리 많아도 걸칠 몸은 하나밖에 없으니,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투성이인, 그게 인생인가 봅니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한계점이 없어 깊이도, 높이도, 폭도 말 수 없으니 여즉, 양껏 살았다면 이젠 질로 살아내야 하는 삶이 아닐까 하는 어중간한 생각이 그녀를 스쳐가네요.    


코트를 걸치고 텀블러에 커피 한 잔 담아 건물 밖으로 나와 앉아있었더니 바람이 제법 쌀쌀합니다. 어쩌다 남아있는 푸른기가 오히려 이상하다 싶게 곧 바스러질듯한 나뭇잎은 몸을 말아 뒹굽니다. 그녀도 몸을 말고 앉아 따뜻한 곳에 앉아 뒹구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입니다.

니콜레타 토마스 카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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