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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Nov 14. 2021

물드는 것이 아니라 제 색을 찾아가는 중

나란히 선,

나무와 나무 사잇길로 부는 바람을 따라 가을이 찾아왔을까?    


이불 빨래를 널고 잠시 숨 돌리는 사이, 길 떠날 채비라도 하려는지 얼굴 내미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한 무더기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공처럼 튀어 올랐다.    


듣기만 하여도 괜스레 좋아지는, 피는 웃음에 담벼락 끝으로 걸어가 길 건너 놀이터를 내려다본다.    


잠깐 사이,

바쁘다는 이유로 마주하지 못한 도시의 가을이 거기 있었다.    


노랗고 빨갛게 물든 잎들이, 짙음을 뺀 연둣빛이, 아이들의 요란함에 놀라 달아나는 까치의 모양새와 어우러져 아름답다.    


문득 가을은 어쩜, 물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제 색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웅크리고 숨어있던 씨앗이 아이처럼 싹터, 햇빛을 따라 뻗은 가지처럼 비바람 속에 다듬어지고, 스스로 불필요한 색을 걷어내는 일, 인생 또한 그러한 가을날의 풍경이 되고자 애쓰는 것은 아닐지 생각되지는 것이다.    


그런 가을날이 되어 놀이터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도 썩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 색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 멀고 어려운 일이 될런가 보았다.    


내 안의 요란함이 쉬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제 색을 찾아가는 길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고, 모처럼 깊어져 가는 가을 날도 마주 할 겸, 제 안으로 숨어들어 안주하는 나를 만나려 가까운 둘레길로 산책을 나선다.    


거칠어지는 숨소리마저 반가움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에 빠져 주변 돌아보는 것에 소홀했을까? 무심코 짓밟고 지나는 낙엽의 바스러짐이 신음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적당히 대충의 달인으로 살아가며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뜻하지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며 낙엽처럼 지나치진 않았을까? 생각을 권하는 눈치다.    


다리도 쉬어갈 겸, 뿌리를 드러내며 길을 내주는 소나무의 가지에 가만히 걸터앉는다. 엉덩이 무게도 가볍진 않을 텐데 오히려 나무는 거친 숨소리를 가라 앉혀 주었다. 작은 일도 참아내지 못하며 제 것 챙기기에 급급한 나로선 참으로 민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소한 생각에 빠져 이렇게 아름다운 산 길을 무심히 지나쳤다니, 괘씸함에 돌부리에 걸려 한 번 넘어져 봐라 할 만도 하건만 이러든 저러든 너그러운 산은 그저 웃고 만다.   

 

그 산을 닮아가고 싶은 걸까? 울긋불긋 차려입은 산악회 사람들이 곁을 지나다 힐끗 시선을 던졌다. 구경 삼는 그네들 생각이야 어떻든, 역으로 구경꾼이 되어 지극히 제 취향을 드러낸 차림새를 재미나게 바라본다.    


언니, 오빠가 난무하는, 들리는 말에 웃음을 흘리며,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언니로 불리고 있음을 생각해냈다.    


뻔한 사실에, 섭섭함이 일었다. 가을은 마음에 없는 사랑도 만들어 괜스레 싱숭생숭 해지는, 누군가에 의해 설레어지기도, 그 흔한 노랫말처럼 '누난 내 여자니까'를 한 번쯤 상상해 보고픈 좋은 계절이기도 한데, 한때는 누구누구의 엄마였고 누구의 집사람으로 불리다 이젠 그런 설렘에서 조차 제켜진 언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묘한 씁쓸함에 빠져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니 제 색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직선으로 떨어지는 낙엽은 없듯이 잘 살아내고 버틴 것은 던져두고서라도, 온통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후회스러운 일들을 되짚어보며 서서히 하강할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다.    


바다를 보지 않았더라면 하늘이 바다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보고 배움에 게으름을 버려야 할 이유가 거기 있음이다.     


그 하늘에 물 빠진 그리움을 던져두고 나뭇잎 몇 장을 주워 든다. 구멍 숭숭 뚫린 상처 그대로 책의 어느 페이지에 숨어 잊힐 낙엽이지만,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그 책이 읽힐 때, 나뭇잎을  바라보는 그도, 가을은 어쩜 물드는 것이 아니라 제 색을 찾아가는 길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따라왔다.    


속세의 무거움을 하나씩 벗어던지는 노스님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나무는 잎들을 떨구기 시작했다. 요행일지라도 줏대 없는 내 안의 요란함도 그 가벼움에 옮겨 붙어 버무려졌으면 하는, 욕심도 일어선다.    


이 가을, 더디더라도 제 색을 찾아갈 수 있을까?

본연의 색이 햇빛을 닮은 노란색이었으면 좋겠다. 바람에 맞서지 아니하는 빈 가지가 되었을 때 ,겨울 새들도 쉬어가고, 어두운 밤 그 가지에 달님도 뎅그렁 걸어 길 밝혀 줄,


이해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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