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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Feb 19. 2022

우리 집 막둥이, 콩

  아니나 다를까? 모든 불빛이 사라지자 어둠 속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늘고 애처롭게 때론 끊어 질듯 이어지는 울음소리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섰다는 뜻이다. 곧 그 울음소리는 화장실로 자리를 옮겨 더욱 처량하게 들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 샤워기를 틀고 고양이가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들고 서 있어야 할 것이다.    


변기 위에 올라서 엄지손톱만 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물을 핥아먹는 고양이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물맛을 음미하는 것인지 눈으로 물방울이 튀어 그러한 것인지 알 순 없지만 흡족해 보였다. 그러나 바닥으로 쏟아져 나의 발등으로 튀어 오르는 물은 여간 차가운 것이 아니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야 할 나로선 충분히 자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내게 그 차가움은 밀려드는 잠을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에고 정말, 미워”

마음과 다른 말이다. 귀찮긴 해도 탱글탱글 빛나며 구르는 고양이의 눈처럼 마주하는 내 눈엔 사랑이 가득 찼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잠자리에 눕는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숨죽이며 고양이의 다음 행동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침대 머리맡으로 올라온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키웠다. 어서 일어나 낚시 장난감을 휘두르며 놀아 달라는 칭얼거림이다.


  팔 년 전, 고등학교 삼 학년인 아들 학교 근처인 지금에 집으로 이사를 왔다. 잦은 지각 때문에 벌칙으로 머리를 빡빡 밀게 된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이 지각을 면하는 대신 나는 매년 덜 익은 감을 따 수돗가 항아리에 담아두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겨울밤이면 꺼내 먹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맛을, 그 차갑고도 달콤한 감 맛을 이젠 맛볼 수 없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 셈이다.


시월의 끝자락이었을 것이다. 전화도 받지 않고 귀가 시간을 넘긴 아들이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제 방을 건너 살그머니 누나 방으로 들어간다. 평소 엄마 말보다 누나 말을 더 무서워하는 아들이니 누나가 알아서 잔소리를 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제야 편히 주저앉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언가 수상스러운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곤거림이,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 누나 방에 그리 오래 머물러 있을 아들이 아니었다. 슬그머니 문을 열자 당황하는 아이들 사이로 수건에 감싸여 떨고 있는 검은 새끼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면서 타협을 시도해왔다. 다가와 어깨며 팔다리를 주무르는 아들과 똥이며 오줌이며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 사정하는 딸이다. 순간 그런 말을 믿고 허락했더니 삼일 지나자 나 몰라라 했다는, 그래 지금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일이 되었다 하소연하는 주변인의 말이 떠올랐다. 뒤처리야 도울 수 있다지만 무엇보다 들어가는 교육비가 만만치 않아 애완동물에 지출할 여유가 없었다.    


뒤늦게, 새끼 고양이가 믿고 다가오도록 두 시간 넘게 공원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는 아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온다. 그랬을 아들이 안되어 오늘 밤만 새끼 고양이를 재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어느 정도 컸다고 십분 넘게 붙어있지 않던 아이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끼 고양이와 오물오물하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하룻밤은 몇 날 밤이 되었고, 그사이 나는 이미 새끼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이유를 찾아내고 있었다. 이사하고 며칠 뒤, 꾸었던 꿈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 꿈은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현관문을 열자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막무가내 집안으로 들어오던 꿈이었다.    


턱시도 차림을 한 새끼 고양이였다. 웅크린 모습이 까만 콩 같아 이름을 콩이라 부르기로 했다. 나 몰라라 하는 아들과 달리 딸은 약속대로 정기검진과 예방 주사, 약 복용까지 따져가며 아이 키우듯 콩이를 돌보았고 적지 않은 지출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콩이는 값으론 매길 수 없는 기쁨을 가져오고 있었다.     


  한동안 이사한 집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한밤중 잠 깨어나 이전 집 마당에 피어있을 구절초 꽃을 보고 싶어 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달빛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을 구절초 꽃무리였다. 그러다 연한 분홍빛으로 또다시 연보랏빛으로 변하는 꽃이다. 감나무 아래 앉아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구절초 꽃을 바라보자면, 왠지 아득히 먼 고향집 양지바른 마당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 것처럼 마음을 편안케 풀어주는 꽃이기도 하였다. 그런 마당을 잃자 마음의 여유도 잃게 되었나 보다. 가족들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집 밖에서는 백 점짜리 소리를 듣는 아빠가 집안에서는 마이너스 이백 점이라며 속상해하던 딸은 그동안 참아내던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독재 타도”

웬만한 일은 웃음으로 넘기려 애쓰던 아이들과 아빠를 향해 외치던 구호였다. 투쟁의 결과는 결국 서로를 등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새 가족인 콩이를 두고 서로 더 많이 사랑받고 있다며 딸과 새로운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도치 않게 콩이를 사이에 두고 감춰둔 속내를 꺼내놓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짐작 가능했던 일들도 있었지만 그동안 알아주지 못했던 이야기가  많았다. 드디어 남자 보는 수준이 꽝이라며 엄마에게 농을 하는 딸에게 불행하게도 엄마나 아빠에게는 보고 배울 수 있을만한 건강한 가정의 롤모델이 없었다 이해를 구하게 되었다. 그것도 나름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는 변명을 얹은 채 말이다.    


한 번쯤, 부모를 마음대로 골라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보았던 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삼신할머니를 원망할 수밖에, 하지만 소중한 내 아이들을 주신 삼신할머니시니, 원망은 커녕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졸음이 쏟아졌다. 흔들던 낚싯대를 내려놓자 콩이가 머리통으로 다리를 비빈다. 놀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졸음을 쫓으며 다시 낚싯대를 흔든다.    


콩이 하나하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물고 빠는 엄마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도 저 아쉬우면 애교쟁이가 되는 콩이다. 나 또한 틈만 나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 콩이를 꼬셔보려 애를 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족 모두에게 이러한 노력을 해보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밤마다 가족 중 누군가 제 물그릇을 냅두고 샤워기를 틀어 물을 달라 조른다면,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웃으며 달려들 수 있었을까? 한두 번이야 참아내겠지만 곧 짜증을 내고 말았을 터였다.    


별스럽지 않은 것들이 콩이를 통하면 웃음으로 피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듣지 않는 또는 상대가 바쁠까 봐 미리 접었던 이야기를 콩이에게 다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콩이는 내게 구절초 꽃 가득 핀 마당이 되었나 보다. 콩이에게 하듯 아무 때고, 아무에게나 “사랑해”를 쏟아놓게 되어 깜짝 놀라기도 하는 요즘이니 말이다.


  새삼 가족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해본다. 그 많았던 사랑은 다 어디로 가고 부풀었던 풍선 바람 빠진 듯 늘어져 흔들거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작은 기쁨을 버리고 좀 더, 좀 더 큰 것만 따라가다 그러하진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어쩌면 콩이는 그런 우리 가족에게 잃어버린 그 사랑을 돌려주려 내게 찾아온, 삼신할머니가 보내주신 막둥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말 잠자리로 돌아가야겠다. 콩이의 작은 울음소리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가듯 또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끈질긴 울음처럼 가족에게 매달려 보았는가 하는 질책이 참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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