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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Jul 17. 2022

빗님은 오시고

감기약에 취한 잠이 비틀거렸다. 꿈길마저 멀미를 일으킨다. 어디를 그렇게 가던 걸음이었는지 걷고 또 걷다 지쳐 그만 잠에서 깨고 만다. 무더운 여름임에도 움츠러든 새벽이 회색빛을 잔뜩 껴입고 있었다.  

     

갑자기 켜진 형광등 불빛에 놀랐을까? 잠 깬 늙은 책장이 긴 그림자를 세우며 인상을 찌푸린다. 어둠에 익었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거리는 것을 보면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으리라. 놀란 것도 잠시, 빈 병 속의 적요가 나를 끌어 삼킨다.      

   

한동안,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지, 몸이 정신을 휘둘렀는지 쉬이 건강을 추스르지 못했다. 장마철의  날씨처럼 비 내리는 어느 하루는 괜찮은 듯하다 햇빛 드는 날엔 뜨거운 열기에 푹 절어 바싹, 바닥에 엎드려 나자빠져 있어야 했다.          

 

장대비라도 뭇매질하듯 때려준다면 물씬 생기가 피어오를까? 하는 생각을 다 해본다.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면 문턱을 괴고 누워 바라보던, 낮은 담벼락을 타고 올랐던 호박잎처럼 무성해지고 싶은 욕심이 어느새 비 내리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의식처럼 옅은 커피 한 잔을 마시고서야 집 나간 영혼이 제집을 찾아들 듯 정신이 맑아진다.       


길게 숨을 내쉬며 집 안을 살펴본다. 큰스님의 설법에 졸고 있던 동자승의 등짝을 죽비가 내려치듯, 가슴 뜨끔하게 충만한 아침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큐에서나 보았을 듯한, 막 새벽안개가 걷히는 평화의 고원 같은 풍경이 나도 모르게 마음을 정갈하게 하여 감사의 기도를 토하게 한다.     


이렇듯 살만한 세상을 내가 잠시 보지 못했나 보다.     


독일에서 휴가를 내고 달려와 마음 든든히 의지가 되는 잠든 딸의 모습이, 무엇을 해도 그저 어여쁘기만 한 아들의 모습이, 평화가 깃든 대자연의 숨결처럼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다. 한없는 감사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사람들은 어떠한 말들을 쏟게 될까?

살펴보니 난 습관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이만만 해서 감사하고,

더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리 좋은 날이 있어 감사하고,

그만한 이유가 있어 감사했다.

딱 내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짊어져 다행이었다.

그저 모든 게 감사한 삶,

쏟아지는 비에 남은 미열도 깨끗이 씻어 내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호박넝쿨처럼 건강한 삶이 무성해지기를 염원해본다.          


비     

먼 길을 달려왔을 것이다

젖은 신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서시는 엄마처럼

빗소리 젖어든다     


제 몸 고단한 줄 모른 채

오랜 가뭄에 상처 난 밤들

어여 잠들라

등 다독이며 들어선다      

    

들끓었던 한낮의 따가움이야 내려놓고

편히 잠들라

머리맡에 앉아 쏟아내시는 엄마의 염원

빗소리 따라선다    


미처, 소화되지 못한 일들은 죄다 쓸어내릴 듯

빗소리 문지르는 뱃구레엔

어느새 신작로가 들어섰다          


우두둑 쏟아지다 거짓말처럼 멀쩡해질 날처럼

사는 날도 그렇다며, 팔 벌려

세상사 잠재우듯

밤새워 다독이시려나 보다    

     

이젠 새들도 허수아비의 허세에 넘어가지 않는 세상

내 늙은 엄마는 여즉

자식 걱정에 젖을 뿐이다      

    

아침이 오면

갓 지은 밥에 된장국 끓여

차려낸 밥상에

밥 한술 떠 깻잎장아찌 올리고

조기 한 마리

엄마가 발라주듯 맛있게 먹을 수 있으려나    


이 밤

꿈도 꾸지 말고 잠들라

빗소리

엄마처럼 다녀가신다  


ㅡ비 내리는 밤은 언제나 잠이 달다.

지쳤거나 지쳐가는 그대의 하루가 편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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