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잔인한 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뜻하지 않은, 근 20년 만에 쉬어보는 삼월이 되었다. 가상적인, 재난영화에서나 있을 듯한 일들이 현실세계에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마스크 미 착용 시 동네 마트나 병원은 출입을 불가하였고, 하물며 공적 마스크 판매는 출생 연도 끝자리를 기준으로 한, 요일별 5부제에 따라 1인 2매를 구입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문제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히려 권장되는 사회가 되었다. 일은 형태 변화를 가졌고, 낮은 사회계층의 사람들은 그나마 지원되던 도움의 손길이 줄어 마음마저 어두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사태의 끝은 불확실해 보이고, 감염자는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란다.
어찌한다. 어찌할까? 참 어려워 보인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매화에 벗 꽃, 진달래 등 한창 봄꽃놀이가 극성스럽게 매체를 타고 전해져 왔다. 그래 함께 할 수 없는 봄 나들이였지만 마음만은 덩달아 들뜬 기분을 느껴볼 수 있던 봄이었다. 그런데 그 봄을 ‘코로나19’는 무참하게 삼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봄이 오면 마음도 봄바람에 조금 흔들리는 맛이 있었다. 겨울 내 움츠렸던 것들을 펼치며 나아진 건 없지만, 단지 봄이란 이유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했었다. 그런데 거리는 유령의 도시처럼 불안한 그림자로 가득 차고, 사람의 소리 대신 기계음만 경고의 안내를 끝없이 되뇌고 있을 뿐이다. 이러다 이 잔인한 봄을 당연시 받아들이며 봄날의 기억조차 잃어버리진 않을까 두려워진다.
요즘처럼 살아가는 날이 재미없을 때가 없다. 둔감해진 감각으로 너나없이 벽을 보고 앉아있는 기분이다. 도대체 오늘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모르겠다.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어린 날의 고향이다. 몇몇이 바구니를 들고 어지간히도 조잘대며 냉이를 캐러 다녔다. 그러다 누구네 다 구별할 것도 없이 어느 집에서 묶은 지를 넣고 김치전을 해주면 참 맛있게도 먹었던 기억이 있다.
생각지도 않은, ‘코로나 19’로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보내긴 쉽지 않다. 계획에 없던 시간이다. 짜여진 흐름을 따라가며 틈틈이 비는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나름 일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있던 자리에서 뽑혀 무중력의 세계로 던져진 느낌이다. 멍한, 생각도 멈춘다.
시간이 나면, 보통 그렇게 말들을 하고 계획을 미루어 두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넘치는 시간이 주어지니 행동은 어렵다. 더더군다나 제한이 걸린 시간소비는,
생각 같아선 빈 집에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할 것이 많다.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의 사람과 거리를 둔 고립이어야지, 지나친 고립은 심장박동과 호흡의 기능마저 저하시켜 마치 기능성 우울 장애자 마냥 모든 것들을 늘어트리며 시체놀이를 하게 한다.
이러다간, 멸망해가는 지구에 몇 안 남은 생존자처럼, 어딘가 남아있을 생존자를 찾아 동맹을 맺고 살아남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체적으로 그만큼의 거리를 두어야 마음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언제나 이분법적인, 사람에게 가닿고 싶으면서도 또 가닿는 건 불편했다. 그런 거리를 둔 섞임에서야 안정감이 들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무차별적으로 그런 일상의 평화마저 박살내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고 갑갑한, 변화 없는 지루한 일상에 주저앉고 마는 걸 허락하기 싫었다. 어디 재밋거리라도 찾아 급하게 연결점을 그어보지만 결국 만나는 건, 벽 과 벽 뿐이다.
누구나 되고 싶은 자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온 힘을 다해 세상을 지키려 저리 애를 쓰는데 나란 사람은 이리 나태하게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으니, 양심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온다. 싫다. 그러나 어쩌랴? 딱 고만큼 밖에 안 되니,
누구보다 스스로 만족하고 싶은 성장의 욕구를 갖고 있다. 변하는 세상과 상관없이 마음속에 자리한 솥단지 하나, 온도를 유지하며 들끓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시간이고 흔들리지 않는, 짜임새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멀어도 한참 멀었나보다.
그러니 이렇게 일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날, 결국 되고 싶지 않은 자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부족한 것만 보이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속도를 지키지 못하고 타인의 속도를 맞추려 허둥대는지, 부끄러운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역시 슬프다.
뱃속 편하자고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를 시켜야한다. 어찌 보면 이 사태는 사람의 의지로만 넘어서기 힘든, 벽에 부딪치는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다.
오늘은 이렇게도 지나는 날이다. 난 바로 여기, 한해의 봄은 이렇게 지나기도 한다고 기억하면 될 것이다.
다시 생각을 한다. 내가 가진 게 뭘까? 고마움이다. 오늘은 김치전이라도 부쳐 영화라도 한편 보며 갇힌 심심함을 달래주어야 할까보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 하나 지키는 것 일게다. 곧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친구를 지키는, 할 수 있는 다 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