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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Dec 28. 2018

로시니의 <작은 장엄 미사>

연말, 막히는 도로, 붐비는 공연장이 두렵다면.....


10년 전만 해도 12월에 공연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다 같이 부르는 <메시아>나, 인류애를 노래한 베토벤 <합창>(https://brunch.co.kr/@sun821018/5) 처럼, 연중행사로 찾아가던 연주회가 있었구요, 왠지 <호두까기인형>같은 발레 공연을, 비싼 값을 치르고서 자그마한 사람의 형상을 멀찍이서 감상하더라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런 게 ‘모두 까기’인가요 이제는 그렇지 않은 편입니다. 막히는 도로, 붐비는 공연장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면(= 요약하자면, 나이를 먹었다면, 혹은 귀찮음이 늘었다면), 연말에는 으레 들어야 하는 음악들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도,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작품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올해 '호두까기인형'은 마린스키에서 현생 인류를 위해 풀어준 유투브 영상으로 즐겼습니다. https://brunch.co.kr/@poulain/9 )


연말이니, 어딘가 경건한 종교 작품이라면 좋겠고, 합창과 독창이 나오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사운드 대신 소박하면서 친밀한 소리를 듣고 싶다면, 이 곡을 추천합니다.


로시니 <작은 장엄 미사> Petite Messe Sollennelle, 1863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하면 <세비야의 이발사> 같은 코믹 오페라를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진지한 내용의 오페라 세리아 작품도 있고, 프랑스에서 쓴 <윌리엄 텔>도 유명하죠.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 두루두루 일찍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로시니가 오늘날 활동했다면, 성공의 모델이 됐을 겁니다. 몇 권의 자기계발서나, 작곡법(실제로 며칠 만에 오페라 한곡을 뚝딱 완성하기도 했으니, ‘삼 일만에 오페라 쓰기’도 가능하겠음)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네요.


로시니 캐리커처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겨우 서른일곱의 나이에 로시니는, 자기 나이만큼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그중 대부분을 흥행에 성공시키며 불타는 삼십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돌연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40여년의 남은 생을 지냈죠. 오늘날 ‘파이어 족’이라고 불리는 삶을, 2세기 전에 이미 살았네요. 작곡에서 은퇴한 로시니는 새 연인과 결혼을 했고, 파리에 머물며 미식의 세계에 빠졌다고도 해요.


‘로시니 스테이크’로도 유명한 메뉴, Tournedos Rossini 입니다.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 유명한 요리사가 로시니를 위해 만든 메뉴로,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 위에 생 푸아그라를 올린 요리예요. 그 요리사는 앙토넹 카렘이라는 설과 카시미르 무아송이라는 설로 나뉜다고 하네요.

* 송로버섯과 로시니에 관한 글이 여기 있네요. “아 라 로시니(a la Rossini)” (https://brunch.co.kr/@sejinjeong/30)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한 대학에서는 '로시니 미식 국제 경연대회‘가 열린다고도. 성공한 미식 덕후인가요



그러면서도 로시니가 작곡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 다른 소리, 다른 이야기를 담은 음악을 쓰려한 건지 모르겠어요. 로시니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간간이 써뒀다가 모아서 발표한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는 스스로 이 곡들을 ‘노년의 과오’라고 불렀죠. '늙은이의 주책' 정도 일까요.그 중에서도 ‘나의 마지막 죄악’이라고 강조했던 곡이, <작은 장엄 미사>입니다. 그런데요, 작으면서도, 장엄하다.... 어딘가 모순되는 제목이죠?


먼저 베토벤의 작품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장엄미사(미사 솔렘니스 Missa solemmis)’는 노래로 부르는 완전한 형태의 미사 음악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장엄하다'거나 '웅장하다'라기 보다는, 미사의 순서(키리에-글로리아-크레도-상투스-아뉴스데이로 이어지는 통상문 전체와 종종 고유문이 추가되기도)가 '완전', 혹은 빠짐 없이 '온전'한 정도가 되겠죠. 이 곡은 열두 개 악장으로, 연주에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리는 대규모 작품이니, 구성이나 규모에 있어서는 '장엄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가하면 한편으론, 네 명의 독창자와 각 파트가 두 명씩인 4성부 합창, 그러니까 열두 명의 가수가 노래하고, 두 대의 피아노와 하모늄(풍금과 닮은 악기로 포근한 소리를 들려줌)이 반주하는, ‘작은’ 편성의 곡이기도 하죠.  

 

*전곡 연주 영상

(합창은 두 배 편성이지만 하모늄이 돋보이는 영상이네요)


역사적 전통과 장대한 규모, 길이로 완성된 곡이지만, 곡을 채운 소리들은 작고 소박한 편성과 악기들이라는 점에서, ‘작은 장엄 미사’란 제목이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이 곡이, 말년의 로시니가 생을 돌아보며 품었던, 낮고 겸손한 마음을 보여준다고도 말합니다.


그는 악보에 이런 글을 적었는데요,


주님, 저는 아시다시피 희극 오페라 작곡가로 살았습니다.
재주는 미천하지만, 열정이 있었을 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로시니는 여기서 노래하는 네 명의 독창자와 여덟 명의 합창단, 모두 열두 명의 가수를, ‘열 두 천사’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는 1867년, 간결했던 피아노 반주를 오케스트라로 바꾸는 작업을 마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화려한 삶을 벗어나 조용한 말년을 보낸 로시니,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생의 마지막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2018년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네요. 그가 사랑한 열 두 천사의 음악, <작은 장엄 미사>와 함께 소박하면서도 장엄한 연말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리에



*글로리아


(보통은 합창 파트를 두 배 이상으로 늘려서 부르곤 하는군요. 메조소프라노 가수 파스밴더가 참여한, 최소 편성으로 구성된, 일명 ‘열 두 천사의 목소리’가 연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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