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성욕으로서 사랑, 그에 대한 의구심

by 잰이

쇼펜하우어는 사랑의 본질을 성욕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과감하지만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먼저,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의지의 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때의 의지는 인간의 신체나 정신에서 이뤄지는 의지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내부가 아닌 객관적 세계의 '의지'가 있으며, 그것이 다양한 개별자의 모습으로 발현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 가운데 영생을 추구하는 의지로써 욕구가 바로 성욕이다.


그에게 성욕은 생장과 번식을 통해 인간의 유한한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발현된 원초적인 무언가이다. 이러한 사랑의 이해는 진화심리학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유전자가 번영하기 위해서 인간은 성욕과 사랑이라는 기제를 가졌다는 방식의 설명이다. 여기서 사랑은 허상이나 환상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환상을 그저 가짜가 아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나는 이러한 방식의 설명이 지나친 환원적 사고가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나는 분명 사랑에 있어서 성욕과 번식욕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데 동의를 한다. 우리의 사고는 신체의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흥분과 떨림, 설렘과 욕구 등은 신체적 욕구나 호르몬의 영향, 진화의 메커니즘 등으로 설명될 여지가 크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나 욕구보다 큰 것을 지칭하는 듯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조건은 관계이다. 사랑은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대상을 향하고 결합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지향과 결합은 항상 번식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즉, 사랑의 관계는 번식의 가능성이 있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동성애나 인류애, 우정, 심지어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나 이상성애 등이 그렇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정상"으로 분류되는 인류애나 우정은 다시 진화심리학에서 집단을 이루고 번영하기 위한 능력으로 키워진 능력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배후에 놓인 유전자의 번영이라는 목적에 따라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말로 유전자의 번영을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것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란 말인가?


결국 사랑이란 우리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본성이라는 설명은 인간의 심리적 과정을 지나치게 비약한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를 떠올려보자. 연인 사이의 사랑에도 성적인 활동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고 느껴지지 않은가? 원활한 성행위와 그것을 통한 번식을 위해, 사랑이라는 환상을 만들고 수많은 재화를 소비하는 삶이 진정한 삶의 의지에 대한 분석일 수 있을까?

사랑의 본질이 성욕이라면 그것에 벗어난 사랑은 본질에서 어긋나며, 비정상적인 궤도를 달리고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사랑은 그보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굳이 모든 사랑이 성욕을 기반하거나 번식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나의 입장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삶의 의지의 발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지는 단적인 번식의 의지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나의 주장이다.


심지어 인간에게는 성적 욕구가 반드시 번식을 목적으로 둘 이유가 없다. 그 시작은 번식을 위한 메커니즘이었다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상과 자연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저출산 시대처럼 더 이상 번식을 목적으로 두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그 번식을 목적으로 두지 않은 세상에서 성적쾌락 그 자체만을 목표로 두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인식의 변화는 성욕의 목적마저 재규정할 수 있다.


우리의 사랑은 성욕 그 이상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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