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시절인연이 있는 것만 같다. 시절인연은 일반적으로 오래전 친하게 지냈던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같이 특정시기에 맺었던 관계를 가리킨다. 본래 이 용어는 불교에서 사용되어, 인과관계에 따라 일어날 일들은 특정 시기가 되면 일어난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세계의 거대한 인과적 흐름이 어찌 되었든, 개인에게 시절인연은 운명과 같이 느껴질 터이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공부나 직업, 경제적 환경 등의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한 인연들이 그럴 것이다. 또, 서로가 좋아하는 시기가 맞아떨어지지 않은 사람들도 그러할 터이다. 사랑이 비극과 같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 강렬함이 무엇보다 강하면서도, 이러한 상황에 마땅히 제 힘으로 대처할 것들이 없다는 점에 있다. 불교는 이러한 관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 말을 단순히 운명을 받아들여라는 의미가 아닌,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라는 말로 생각해 본다.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는 것과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시절인연에 대한 두 태도는 모두 사랑이란 강렬한 감정에 대한 체념을 요구한다. 그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보다 많은 태도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의 분다>의 노래가사는 내게 시절인연에 대해 다시금 곱씹게 만들었다. 시절인연은 종종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경험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대는 내가 아니기에 한 자리에서의 경험조차 당연히도 다른 감정과 생각, 고민들로 이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듯하지만, 사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같은 것"은 없다.
그대가 나와 멀어지거나 다른 인연과 가까워진다면, 무릇 그러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연의 관점이다. 인연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인간이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진정 그 사람들과 가까웠던, 혹은 진정으로 위하던 사이라면' 그대의 이유들까지는 미루어 볼만 하지 않을까? 그래, 그마저도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대가 그러한 인연을 가진 이유를 생각해 보고,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렇게 멀어지는 시절인연을 이해하는 과정은 단순한 체념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다른 점이 있다. 내게 시절인연으로서 소중한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차이 말이다. 물론 이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대는 내가 아니다. 관계에서는 나만의 감정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나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도, 그 과정에서 내가 더욱 관계유지를 위해 노력할지 그저 거리를 둘 것인지도 그대를 그대로서 생각하고 결정할 일이다. 다만, 그 마음을 다 알지 못해 온전하지 않은 추측으로 못다 배려할 나 자신의 태도가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