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존재인가? 혹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나? 삶에 목적이나 이유가 있다는 사유는 그렇게 쉽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런 입장에서 삶이 허무하며 무의미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사람들이 못마땅해 보인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삶에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어떤 목적도 없다는 말은 삶에 목적이 있다는 말과 기본적으로 같은 수준의 기반을 가진다. 증명할 수 없이 자신의 직관에 기대어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제시해야 한다는 방식에 주장의 근거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을 목적론적으로 바라보거나, 니힐리즘으로 보는 관점도 결국 어떠한 이야기나 태도에 매료되어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전형적인 말로써는 끝내 완벽히 증명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철학에서는 "최선으로서 설명"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과도한 가정들을 붙이기를 지양하고, 다양한 가능성 논제들 가운데 가장 개연성이 있는 설명을 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과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둘 다 잘 이해한다면, 무엇이 삶과 그에 대한 사유를 최선으로 설명해 냈는지 알 수 있을까? 적어도 무엇이 개연적인지 알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서로 다른 소설 속 세계관 가운데 하나를 내 삶에 적용하라는 권유와 같다. 그것은 결국 내 마음이 더 가는 곳, 즉 믿음이 생기는 쪽으로 기우는 선택일 뿐이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결판이 나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시 특정 관점의 세계관이 논파가 가능해 보이는 주장들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기대고 있는 세계관도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 교리나 성경의 구절이 의아하다면, 영원회귀 같은 개념도 충분히 의아할 지점이 있다. 반대로 과학도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으며, 반증주의와 같은 존중할 만한 과학적 태도 또한 과학계 안에서도 다른 과학적 관점이 낫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세계관이라고 말하며,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모델이라고 분석한다. 어떤 세계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사랑은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진다. 이 세계가 다양한 모델로 해석되는 만큼 사랑은 너무나 어려워진다. 그러나, 좌절도 실망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그것을 알려고 하는 데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게 사랑을 알고 싶은 이유는 더 나은 사랑을 하는 데 있다. 설령 더 좋은 사랑이 없을지라도 그러한 노력이 동반되는 사랑이 더 좋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이 혼란한 세계관의 범람 속에서 방황할지라도 나아갈 선택지가 있다. 인간에게는 동경과 모방의 능력이 있기에 다양한 세계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좋아 보이는 모습을 찾아본다. 지금의 사유 활동도 기웃거리기나 어린 왕자의 별나라 여행과 비슷한 작업일 터이다.
그 세계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서 사랑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기꺼이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익혀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