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덴마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조용했던 극장에서 유일하게 눈에 들어왔던 영화 '더 길티'는 정말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를 관람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 당시에도 관람 후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머릿속에서 되새겼던 기억이 있는데, 1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모로 이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글의 제목을 '반성의 자세'라고 적었다. 과연 반성을 하는 당사자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느냐... 최근 들어서 더 깊게 고민하게 됐다.
이 영화를 관람한 후 지금까지 대략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사건 사고들을 보고 들었다. 그때마다 가해자에게는 분노를 느끼고, 피해자에게는 연민과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건의 가해자들은 어쩌면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덮어 씌우고 정당화하기 위해 분주할 것이다. 그 가해자들은 '인간적으로' 피해자들에게 다가가 머리 숙여 사과해야 마땅할 것이며, 그게 가장 이상적이고 올바른 반성의 자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가해자들은, 우리가 듣고 있는 가해자들은 진심 어린 반성을 해왔는가. 누군가는 입을 다물고 있고, 누군가는 가벼운 변명으로 넘어가고, 누군가는 돈으로 사건을 덮으며, 누군가는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다.
과연, 반성의 자세란 무엇일까.
편견
'아스게르'는 평소에도 감정을 유연하게 표출하지 못하며, 자신의 기준으로 주변의 상황을 평가한다. 상대방의 인상착의, 상대방의 목소리와 주변 환경 등을 파악하고, 자신의 기준에서 상대를 평가한다.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신고 전화 속 당사자들에게도 모두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철저하게 상대방에게 '편견'을 기반으로 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수화기로 들어온 신고자들도 모두 큰 사고가 아닌 마약, 매춘 등 불순한 의도로 인해 생긴 문제들을 가지고 신고전화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고, 결국은 화를 자초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아스게르는 그들의 신고에 대해 상당히 느리게 대응해며 심지어는 조롱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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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게르의 이러한 태도는 '이벤'이라는 여성의 신고전화를 받은 후에도 이어진다. 전 남편 '미카엘'이 이벤을 납치했고, 그들의 아린 딸이 아빠가 엄마의 머리를 잡고 끌고 나갔다 했다. 심지어 미카엘은 폭행죄로 인해 수감된 적이 있는 전과자다. 이 이야기들로 짐작해 아스게르는 미카엘이 다시 한번 범죄를 저지를 것이며, 이벤이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 판단은 앞뒤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로지 전화 속 음성만으로 판단하려는 자의 실수였다.
누가 되었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고 일을 해결하려 든다면 결국은 일이 꼬이게 된다. 살인과 폭행, 절도 행위에 대한 수사는 어디까지나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의 관할이며,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상태를 파악하며, 여러 증거자료를 수집하여 범인을 추론해야 마땅하다. 현장 경찰들은 그들의 눈과 귀, 코, 그리고 손끝을 통해 현장의 상황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불확실한 편견이 아닌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아스게르는 눈을 감고 귀로만 사건을 듣기 바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과연 눈으로 사건을 보고, 상황을 판단하고, 증거를 확인하지 못한 그가 오로지 청각만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는 더 이상 현장 경찰이 아니다. 아스게르는 현재 신고센터에 속해있으며,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행위를 하고 있다. 마음이 급하고, 단서는 부족하며, 판단력은 흐리고, 증거도 없는 그는 가장 위험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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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위험한 심리 중 하나다. 더욱이 사람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직업의 종사자가 편견을 가지고 사람의 지위를 판단하고, 그 판단의 기준에서 적절하지 못하단 이유로 철저하게 외면해 버린다면, 그로 인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뿐이다. 이미 편견으로 사람의 상태를 판단해서 자신의 기준을 정해버렸다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준을 표출해 낼 것이다. 편견으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는 그 누구보다 큰 상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
아스게르는 과거 현장 경찰이었다. 어느 날 동료와 함께 순찰을 돌던 중 위법 행위를 하던 청소년에게 진압을 목적으로 총을 겨누다 결국 그를 살해하고 만다. 그 일로 아스게르는 좌천되어 신고센터로 가게 되었고, 그의 동료는 아스게르의 유일한 증인으로서 법정에 올라야 한다. 아스게르는 동료 '라시드'에게 무죄를 위한 거짓 진술을 부탁했고, 라시드도 이미 한차례 진술서에다가 거짓 진술을 한 상태라 어쩔 수 없이 그의 뜻대로 해줘야 했다. 그렇기에 아스게르에게는 다음날 있을 재판이 더욱더 중요했고 보다 더 신중했다. 그는 이미 경찰로서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한 생명을 앗아간 죄를 진 상태이기에 이번 재판에서 자신이 결백하고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는 걸 입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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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이벤이라는 여성의 신고전화를 받으면서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안고 사건을 해결하려 나서고, 아스게르는 자신만의 편견으로 범인을 추려낸다. 그렇게 그가 마음속에 품은 불편함이 관할을 넘어선 개입이 되었고, 사건에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일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벤의 막내아들인 어린 아기가 복부에 큰 부상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에 분노한 아스게르가 미카엘을 더욱더 몰아붙이면서 이벤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지시하고 만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이벤은 아스게르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아기는 괜찮아요. 더 이상 울지 않아요. 내가 뱀을 꺼냈거든요."
이벤은 아기의 배에서 뱀을 꺼냈다고 말한 뒤, 자신에게 다가오는 미카엘에게 차 안에 있던 벽돌로 그의 머리를 가격하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아스게르는 그 순간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였음을 깨닫는다. 미카엘이 이벤을 데리고 가려한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이벤도 이미 한차례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입원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이벤이 환각으로 인해 자신의 아기를 살해한 것이고, 이를 보고 참지 못한 미카엘이 이벤을 데리고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려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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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게르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두 차례나 타인에게 죄를 지게 된 것이다.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을 가졌던 그는 이번에라도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다음날 있을 법정에서 무죄를 입증하려 했지만, 그 당시에도 위법행위를 하던 청소년을 보며 가진 마음속의 악한 감정이 살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그의 객관적이지 못한 편견의 판단들은 끝내 또 다른 비극을 만들고야 말았다. 자신의 실수를 통해 큰 화를 당하였음에도 결국 자신의 행동을 반복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은 또다시 죄를 저질렀고, 결코 쉽게 바뀔 수 없었다.
죄책감
고의적으로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과, 실수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 중 누가 더 큰 죄책감을 가지게 될까. 당연히 실수로 인해 피해를 입힌 사람일 것이다. 죄책감을 갖는다는 건 진심으로 그 일이 잘못된 일임을 아는 것이고, 그만큼 마음이 약해서 그러한 사건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누군가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철저하게 입을 막는다. 자신은 결백하며, 자신의 소행이 아니라 장담한다. 어떻게든 일을 덮으려 하고,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소행이라 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죄책감이란 감정이 없을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죄책감은 마음의 힘이 약한 사람에게 생기는 피해의식이니 말이다.
누군가가 자신은 공무집행으로서 당사자를 제압한 것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면,그는 절대로 자신의 죄라고 자백 할리 없다. 그렇게 가해자들은 서로 입을 맞춰 법정에서 자신들은 무죄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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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게르도 이러한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자신의 죄라고 밝힐 것인지, 아니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할 것인지. 하지만 법정 소환 하루 전에, 아스게르는 사건을 맡게 됐다. 그리고 그 사건은 아스게르의 마음속 깊은 흉터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자신이 아기를 구했다고 생각하던 이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려 자신의 손에 피가 묻어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이 자기의 아기를 살해했음을 홀로 남겨진 뒤에야 알게 된다. 그렇게 아기를 죽였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이벤에게 아스게르는 고백한다. 자신도 사람을 죽였다고, 자신도 눈을 감고 사건을 덮어버리고 싶고, 지금도 자신이 정당한 행동을 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틀렸다고, 지금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아스게르에게 이벤의 모습은 결코 남 같지 않았고, 그녀의 참담한 심정을 자신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의 상처가 아프기 때문이다. 아스게르는 그동안 마음속에 눌러뒀던 상처의 아픔을 이벤의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내뱉었다. 지금껏 그 죄책감을 마음에 묻어둔 탓에 이 사건에 집착하고 있었고, 그 집착이 아스게르의 사고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습관적인 편견이 사건 수사의 흐름을 망쳤고, 그 끝에는 처절한 슬픔과 후회, 죄책감만이 남아버렸다.
아스게르는 이벤을 통해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이벤에게 죄가 없다고 위로해 주는 아스게르는 그렇게 무죄를 언급하며 유죄를 인정했다. 또다시 자신으로 인한 피해자가 없길 바랐고, 그 가해자가 자신이 아니길 바랐다. 그 순간에 들리는 이벤의 마지막 소리에 아스게르는 이번에도 자신이 가해자가 됐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정적이 흐르는 사무실에서 그의 귓가에는 현장의 경찰관들이 이벤을 이송했다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스게르는 자신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느낀다.
아스게르는 헤드셋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일어나 복도로 걸어 나가며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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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의 자세
영화 '더 길티'의 핵심은 편견을 가지고 죄를 지은자의 태도, 그 사람이 가지는 죄책감의 고백과 반성에 있다.
아스게르란 남자는 표현이 서툴러서 잦은 다툼을 만들어내고, 자신만의 판단력으로 행동하다가 주변 인물들로부터 질타를 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융통성없이 하게 된 행동들은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져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고, 달라지기 위해 노력들을 해왔지만 돌아온 건 달라지지 못한 자신의 본성뿐이었다.
결국 아스게르도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죄가 없다고 밝히고 싶었고, 자신의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아 최대한 가리려고 애썼다. 그렇게 하루만 버티면 됐지만, 이벤이라는 여성이 그의 마음을 건드렸고, 아스게르는 그녀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그리고 동료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달라 부탁했지만, 끝내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또 한 번 부탁한다.
범죄자들은 범행을 저지르게 되면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다. 그렇게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법정에서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자신의 몸과 말을 숨기고 어떻게든 죄를 벗어나려 애쓴다. 그렇게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만 숨기기 급급한 이들은 절대로 피해자에게 반성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피해자는 타인이 아닌 자신이며, 법정에 선 그 자체에 겁을 먹고 숨고 싶어 하는 겁쟁이니 말이다.
타의에 의한 고백이 아닌 자의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하는 자세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죄를 지은 거부터가 일반적인 행실에 어긋나지만, 그 후에 있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 미안함을 느낀다면, 자신의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한다. 공권력을 운운하며 과잉진압을 행한 경찰들도, 권력을 빌미로 여러 피해자를 낳은 정치인들도, 신분을 악용하여 사람의 인권을 박탈한 범죄자들도 모두 세상에 나와 자신의 입 밖으로 죄를 말해야 한다.
진심 어린 반성의 자세로 자신을 인정해야만 자신도 달라지고, 피해자들도 치유를 하며,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반성의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