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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Aug 18. 2020

살생이 아닌 공생의 승리

영화 '덩케르크'가 보여준 후퇴의 의의


* 이 리뷰에는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메멘토', '프레스티지', '다크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자신만의 확고한 색깔로 언제나 특별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2017년에 내놓은 한 전쟁영화가 있었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연합의 덩케르크 후퇴 사건을 영화화한 영화 '덩케르크'다.  


 대게의 전쟁영화들이 귀를 찢는 포격과 비명소리, 앞을 보지 못할 정도의 폭발 등 그 규모와 전쟁이라는 상황의 폭력성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앞으로 진격해 상대를 제압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아닌,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드라마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놀란 감독은 전쟁이라는 두려움의 현장에서도 절대 감정을 건드리는 서사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관객들에게 감상이 아닌 체험과 경험의 감각을 더 일깨우려 했고, 비록 각색된 이야기일지언정 역사의 순간과 그 결과의 희열에 더더욱 초점을 맞췄다.


 앞서 리뷰했던 '1917'과 더불어 전쟁영화 중 가장 차분하면서 그 끝에 큰 울림과 메시지를 가진 전쟁영화라 생각한다. 이 두 영화 모두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소리와 타격의 액션보다, 그저 한 사람으로서 보이는 개개인의 리액션과 드라마의 서사 속에서 살생이 아닌 공생의 희망을 보여줬다.  




인간이 만든 전쟁, 전쟁이 만든 인간



 하나의 수단을 얻기 위해서 서로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나 하나의 목숨을 부지하는데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동료가 옆에서 죽고, 내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상황에서 지금의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에, 그 공포와 두려움이 결국은 사람을 가장 이기적이게 만든다.

 '우리 부대'가 우선이고, '내'가 먼저이며, '너'는 결국 '남'이 된다. 이기심에 의해 생긴 울타리는 그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저 내부에서 무너질 뿐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중 하나인 생존에 대한 갈망에 갇힌 이들은 아무런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다. 전쟁과 고통, 죽음은 인간성을 무너뜨리게 하고, 그것이 결국에는 개개인의 자멸과 한 국가의 종말로 다다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서로가 서로를 해하며 살생이 난무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게 될 때, 어느 누구도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버텨나가지 못한다. 적의 공격에 의해 바다로 떨어져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내 옆에 있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경계해야만 하며, 살고 싶어서 도망쳤을 뿐인데, '나'와 다르다고 외면당한 탓에 침몰하는 선박 속에서 숨 죽이며 가라앉고 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은 모두 남에게서 빼앗고, 다시 남에게 빼앗기는 '제로섬'의 상황극이다. 남에게서 빼앗고 다시 빼앗길지언정 이득을 보기 위해 싸움을 벌이지만 그 과정에서 승리하기란 쉽지 않다. 한번 시작된 전쟁은 애들 장난처럼 가벼운 타박상만 얻은 채 투덜대면서 토라지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손가락이 한번 움직이면, 누군가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고, 버튼 한 번으로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절대적으로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어있고, 그 손해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패배하지 않는 한, 전쟁은 멈출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제로섬의 상황극은 더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는 나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으니 말이다.



3의 규칙



  영화 덩케르크는 육지와 바다, 하늘에서 탈출하려는 자와 구출하려는 자, 그들을 도와주는 자의 시선으로 영화가 흘러간다. 하지만 각각의 세 장소에 속해있는 세명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닥쳐오는 위협과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갖는 불신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위기에 직면한다. 세 명이 만들어놓은 안정된 틀은 외부의 압력을 받아 위태로워지고, 결국은 내부에서 서로를 믿지 못한 탓에 무너지게 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육지에서의 주요 인물들은 영화의 시작부터 살아남은 병사 '토미'(극 중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인물의 설명에서는 토미로 명시되어 있다.)와 프랑스군 '깁슨', 이후에 합류한 '알렉스'(이 역시 설명에서만 명시된 이름) 세 명이다. 이들은 탈출을 위해 구조선에 오른 뒤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 배가 침몰되면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같이 다니며 배에 오르고 내리 고를 반복하던 중, 해안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낡은 배를 향해 이동하는 한 부대원들을 보고 그들의 뒤를 쫓는다.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을 잘못 알고 있던 이들은 뜻하지 않은 독일군의 총격을 받게 되면서 패닉에 빠지게 되고, 그 속에서 한 두 명씩 생존에 대한 집착을 하기 시작하자, 지금껏 곁에 있었음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깁슨을 독일군 스파이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깁슨을 강제로 배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바다에서의 주요 인물은 개인 선박을 보유 중인 '도슨'과 그의 아들 '피터'. 그리고 그 배에 자의로 탑승한 '조지'가 있다. 이들은 덩케르크 해안으로 가서 그곳의 고립된 수많은 병사들을 태우고 고국으로 데려오라는 국가의 부름으로 인해 덩케르크로 향하던 중, 적군의 공격으로 바다 한가운데에 표류된 '한 병사'를 발견하고는 구해준다. 잔뜩 겁에 질린 탓에 움츠려 든 그에게 배의 인원들은 따뜻한 음료와 담요를 건네며 그를 위로해 주지만, 이들이 덩케르크 해안으로 간다는 걸 알게 된 병사는 배를 돌리기 위해 몸싸움을 벌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하늘에서의 주요 인물은 스핏 파이어 전투기팀의 '팀 리더'와 '콜린스', '파리어'가 있다. 이들은 덩케르크 해역의 상공으로 가서 동태를 살피기 위해 이동하던 중, 독일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팀 리더는 사망하게 되고, 계속되는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멀리서 보이는 영국군의 피해 모습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생존과 공동체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세 개의 공간, 세 개의 시간, 세 명의 인물들. 영화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보이는 이 '3의 규칙'은 조직으로서 갖는 공동체 의식과, 하나의 틀 속에 속한 사람들의 안정감을 표현해 낸다. 하지만, 짜인 틀을 향해 외부의 힘이 작용하면 그 틀이 무너지면서 내용물이 밖으로 쏟아지거나, 외부에서 안으로 침투하게 된다. 정해진 규칙에 의해 하나로 묶여 공동체의 활동을 하는 군인들도, 신뢰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가족도, 가장 안정적이었던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로서 낯선 외부인의 입장으로 뜻하지 않은 위협을 받게 된다. 1의 틀 안에 속한 3명의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무질서의 불균형에 노출되어 위협을 받게 된다.




이름이 있는 자들과 이름이 없는 자들


 

 영화에 등장하는 세 공간의 인물들 중 계급과 신분이 불리는 것을 제외하고, 본인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바로 육지에서 탈출을 기다리는 세 명의 병사들인데, 이들은 서로 붙어있음에도 단 한 번도 이름을 말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깁슨도 본인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름이 불림으로서 관계가 형성되며,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고 어울릴 수 있다. 또한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친밀해지고 가까워지게 된다.

 이렇게 이름을 알기에 형성되는 친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바다와 하늘의 인물들이다. 바다에서는 도슨과 그의 아들 피터, 그리고 피터의 친구 조지가 있으며, 하늘에서는 파리어와 콜린스가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곁에 있음을 인지하고, 위기에 직면해서 서로가 흩어지게 될 때,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걱정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반면에, 육지에 있는 세 병사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서로가 긴박한 순간에 마주했고, 계속해서 위협을 받아 배에 오르고 내리고 반복한 탓에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며, 위의 인물들처럼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기에 이름이 불리는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모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알지 못해 생긴 부정과 불신이 이들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만다.


 영화는 시작부터 그 끝까지, 이 이름 없는 한 병사(토미)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이름도 없고, 과거도 알 수 없지만 관객들은 한 사람을 집요하게 쫓으며 숨 가쁜 탈출극을 따라나서기에 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인식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으리라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육지의 병사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것은, 익명성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병사들이 평범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모두가 같이 구출되어야 함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덩케르크 구출 작전은 덩케르크 해안에 있는, 이름을  알고 있는 특정 한 사람만을 구출해 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끝이 없는 전쟁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 위해, 또 훗날 있을 또 다른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해안에 고립된 '모든' 병사들을 무사히 고국으로 데려와야 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기에 '구출되는 병사들'에게는 익명성을 부여해서 모든 병사들이 동등하게 구출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고, 반대로 '구출을 돕는 이들'은 이름을 부여하여 그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동시에, 그들 덕에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살생이 아닌 공생의 승리



"어른들이 만들어낸 전쟁에 젊은이들이 피해를 봐선 안되지."


 자신의 배에 올라탄 병사가 덩케르크로 향하는 배를 보며 영국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자 도슨이 그 병사에게 한 말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전쟁에 젊은이들이 뛰어들어 위협에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은 기꺼이 배 한 척만 이끌고서 전쟁터로 향했고, 비록 공포에 떨며 힘들어하는 병사가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결코 되돌아갈 수 없었다.


 구시대의 문명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한 탓에 신세대의 문명이 퇴색되고 망가져갔다. 신시대의 젊은이들은 구시대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절망의 환경에 내몰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바라본 게 구시대의 어른들 이였으며, 젊은이들이 살아 돌아오길 희망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친구인 젊은 병사들이 죽음이 두려워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도록, 어른들은 기꺼이 전쟁의 후방으로 다가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다.


 덩케르크 해역의 참호 위에서 탈출을 지휘하던 해군 사령관은 바다의 지평선에서 무언가를 보게 된다. 무수히 많은 점들이 점점 이곳으로 다가오자 그는 급히 망원경으로 지평선을 응시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육군 상관이 그에 묻는다.


"뭐가 보이십니까."


 그러자 해군 사령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한다.


"고국..."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의 눈에 보인 것은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여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와준 수많은 민간인들의 선박들이었다.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주한 것은 따뜻한 희망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은 제로섬의 상황극이다. 하지만, 이러한 극한의 환경에서도 역사에는 일부의 '논제로섬'이 존재했다. 전쟁의 현장에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누군가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준 이들이 존재했으며, 이 영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눈앞의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오면 자리를 비켜 그들이 지나가도록 협조했다. 가라앉는 선박을 버리는 순간에도 그 안에 갇힌 이들이 살아 나오도록 출구를 힘겹게 열어 탈출을 도왔고, 그렇게 바다에 표류된 군인을, 민간인들이 아무런 경계심 없이 끌어올려주었다. 그리고 절망적인 전쟁터의 끝자락에 놓인 젊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국민들이 선뜻 나서서 수많은 병사들을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들의 역사는 전쟁터로 뛰어나가 용감하게 적을 무찔러 위대한 승리를 거머쥐진 못했다. 너무나도 안쓰럽고 처량할 정도로 살기 위해 도망가기 바빴고, 무기와 보급품도 버리고서 배에 올라타 구출되기 바빴다. 그런 병사들은 기차를 타고 역에 도착하는 순간, 기차 밖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자신들은 전쟁터에서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었고, 살려고 뛰어오느라 정신없었지만, 지금에서야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병사들에게 야유가 아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병사들이 전쟁의 승리를 이뤄낸 것이 아님에도, 그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 그 하나에 대해 위로와 축하의 박수를 보내줬다.


 하나의 수단을 얻기 위해서 서로를 공격하는 전쟁에서도 희망은 존재했다. 눈앞의 적을 죽여 내가 살아남지 않아도, 도망치기 바쁜 나를 기꺼이 도와줄 은인들이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 속 한 장면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도 살생이 아닌 공생으로서 승리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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