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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May 18. 2020

살아남기 위한 의지

영화 '1917' 속 생존을 위한 의지


* 이 리뷰에는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샘 맨슨 감독이 연출한 영화 '1917'은 사실적인 전장의 묘사와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담아낸 인상 깊은 영화다. 이 영화가 이번 2020년 초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 작품, 연출, 편집, 음향, 시각효과 등 다양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소식에 많은 이목이 집중되었고, 국내에서도 상당히 늦은 시기에 개봉했음에도 그 당시 개봉작들 중에서 단연 추천작으로 꼽혔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관람객의 수가 줄긴 했지만, 확실히 영화 자체는 특별했고, 관람에 대한 후회는 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상을 받을 만큼 대단한 영화인 건 틀림없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편집 없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원 컨티뉴어스 샷'이라는 독특한 기법을 이용한 것이 가장 큰 이슈겠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촬영에서만 주목을 받을 만큼 각본과 주제가 허술한 영화는 결코 아니었다.


  앞선 '그래비티'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영화의 이미지가 평범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이 특별하다면, 혹은 겉 상자가 화려해 시선이 집중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특별하다면, 그 영화는 좋은 영화라 불려도 마땅하다. 영화 1917도 나에게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의 분위기는 다운되어 있지만, 이야기의 끝은 폭발적이고, 주인공은 무표정을 짓고 있지만, 감정은 서글펐다.


 이제는 표면적인 이야기만 특별한 영화는 보기 드물다. 최근의 영화들이 표면의 이야기가 밋밋하더라도 그 속은 늘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중적인 특징이 좋다고 하더라도, 결국 영화는 이야기에 맞는 주제가 필요하고, 그 주제에 맞는 전개가 필수적이며, 그 전개에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 불필요한 감정과 표현을 배재하고,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어나갈 과감한 선택 말이다.



살아야 하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



 영화의 주인공은 두 사람으로 나온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이 두 사람이다. 바닥에 누워있던 블레이크는 상사의 부름에 잠에서 깨어나고, 그 옆에서 나무에 기대어 자던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의 의해 깨어난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장군의 명령으로 멀고 먼 길을 지나 맞은편 부대로 넘어가 돌격 중지 명령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블레이크는 지도를 잘 볼 줄 알고, 그의 형이 도착지에 있는 해당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누구보다 이 임무에 적한 인물이다. 반면에 스코필드는 이 임무에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블레이크가 같이 가자고 하여 따라온 것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블레이크는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이 임무의 성공을 바라며,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인물이고, 스코필드는 그와는 다르게 오로지 자신 스스로 살아남길 바라는 인물이다. 임무의 막중함과 동시에 가족의 생사가 달렸던 블레이크는 시작부터 다급하게 적진으로 이동하는 반면, 스코필드는 계속해서 날이 어두워질 때 움직이자고 그를 만류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렇게 시작부터 성격, 특징, 설정이 다르던 두 사람의 운명은 이후 극명하게 뒤바뀌게 된다. 적군의 비행선이 이들을 덮치고 그 비행선에 타고 있던 독일군을 살려주지만, 돌아온 건 살의의 찬 칼날뿐이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블레이크의 복부를 찌르며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렇게 살아야만 했던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목적지의 이동경로도, 지도를 보는 방법도 전혀 모르던, 알지 못하는 자만 살아남게 된다.


 이 찰나의 순간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바뀌게 됐다. 마치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도 끝내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사처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사람은 결국 짓궂고 야속한 운명의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그 결말에는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공포에 떠는 얼굴만 보일 뿐이다.


 살아야 했던 자는 살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 공포를 느끼게 되고, 알지 못하는 자는 알아야만 살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알지 못하는 자에서 구원자가 되기까지


 

  스코필드의 여정은 역시 순탄치 않았다. 얼떨결에 막중한 임무에 참여하게 되고, 수많은 시들을 넘나들며, 손이 다치고, 지뢰가 터져 돌더미에 깔리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마저 죽게 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스코필드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위험한 상황을 겪게 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을 도와주는 구원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도 스코필드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레이크를 잃은 직후 그 근처를 지나던 다른 부대가 스코필드를 발견하고는 그가 가는 목적지 부근까지 차로 데려다준다. 그러다 차바퀴가 구덩이에 빠져 벗어날 수 없을 때, 스코필드는 직접 나서서 차가 구덩이에서 벗어나도록 안간힘을 쓴다. 자신은 이 시간에도 앞으로 가야 하고, 지금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의 행동은 그 차에 타고 있던 10명 남짓의 병사들과 그 부대 전체의 시간을 벌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 셈이다.


 이후, 잠시 정신을 잃어 새벽에 눈을 뜬 스코필드가 독일군에게 공격을 받을 때 급히 몸을 숨긴 반지하 방에는 갓난아기를 돌보고 있는 프랑스 여인이 었었다. 그녀는 독일군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숨어 지내던 중 스코필드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상처 투성이의 스코필드를 보고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의자에 앉히고 손수건으로 그의 상처 부위를 지압해 줬다. 그리고 스코필드는 그녀가 부모도 없는 아기를 돌보는 것을 보고 자신이 출발 전에 챙겨둔 식량들을 건네주며, 자신이 물 대신에 채워놨던 우유를 아기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그렇게 여인과 아기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그는 방에서 나와 적군의 총알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한다. 자신의 몸을 던져 폭포수 아래로 떨어지고, 숨이 가빠오는 찬 물속을 해엄 쳐 지나서 채리 나잎이 흩날리는 숲 속에 도착해 초점을 잃은 눈으로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숲 속 너머에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부대를 찾게 되고, 스코필드는 마지막 힘을 다해 발걸음을 옮겨 전쟁에 대비하는 참호 속으로 들어간다. 사방에서 터지는 폭탄, 귀를 찢는 굉음과 장교들의 고함 소리, 쉴 새 없이 달려드는 병사들, 그리고 그 속에서 홀로 자신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는 스코필드. 마침내 그 많던 위험과 고난을 뚫고 스코필드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수천 명의 병사들을 살리게 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사람은 앞으로 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되고, 벽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돌파구는 존재하고 구원자는 늘 곁에 있다. 스코필드도 목적지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목숨이 위험한 상황들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스코필드는 다시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알지 못해 방황하던 남자는 도움을 통해 살아났고, 그들에게 다시 도움을 주며 구원자에 이른다.

  


전달되는 의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던 스코필드지만 그는 이 상황에서 임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관은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고, 죽은 동료는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상관의 명령은 스코필드 자신이 아닌, 블레이크에게 더욱 직접적으로 전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있어 지금 이 일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 건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은 지금의 임무를 완수해 달라는 것이 아닌, 자신의 형과 어머니께 자신의 마음을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코필드 옷 속에는 중지명령의 편지를, 가슴속에는 블레이크의 마음을 담아 넣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한참을 움직이고 반지하의 방에 들어서며 프랑스 여인과 갓난아기를 만났을 때, 스코필드는 아기에게 시를 들려준다. '바다로 나아가는 누군가. 겨울 아침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 바다로 나갔다.' 마치 총알이 빗발치고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스코필드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처럼, 추운 겨울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 '그'는 바다로 나갔다. 스코필드는 그 시를 읊으며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을 다시금 깨닫는다. 지금 자신은 이 따뜻하고 아늑한 반지하에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신은 동료가 가지고 있던 임무와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마음을 전달해야만 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임무에 대해 소극적이고, 행동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젊은 병사는 동료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명분과 힘을 얻었고, 그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만난 이들로부터 생명을 얻고 생명을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코필드는 많은 이들로부터 반드시 살아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의지를 전달받는다.



마치 거울을 보듯



 영화가 시작될 때, 주인공은 나무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고, 후반부에도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청한다. 독일군의 참호 속 동굴에서 함정이 터져 스코필드가 돌에 깔리게 될 때, 블레이크는 스코필드가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일어나 살아나가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일으켜 세운다. 이후 독일군의 칼에 찔려 블레이크가 쓰러졌을 때는 스코필드가 안간힘을 쓰며 블레이크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들판을 지나 깊게 파인 참호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장군의 기지에서 명령을 받게 되고, 마지막에는 다른 부대의 참호 속으로 들어가 대령의 기지에서 임무를 완수해 낸다.

 

 이처럼 영화적인 좌우 대칭으로 스코필드의 무기력하고 비관적이던 초반의 태도에서 의지를 갖고 목숨을 바쳐 임무를 완수해 내는 후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성장을 극적으로 비교해 극의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이 거울을 보는듯한 연출에서 우리는 스코필드의 힘겨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임무가 완수되었음에도 생기는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그 처절하고 위험한 순간을 넘겨 수많은 생명을 살려낸 이 힘없는 병사의 영웅담은 그 극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상처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그저 긴급한 전보를 넘기러 온 병사에 지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두고 박수를 치며 웃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스코필드는 그 과정에서 친구마저 잃게 되고, 마지막까지 그의 형에게 가슴 아픈 위로와 이야기만 해줄 뿐이었다.  


 스코필드는 마치 거울을 보듯 그 길고 험난했던 여정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거울을 통해서 자신은 성장했지만,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어쩌면, 불과 몇 시간 전에 지나친 그 프랑스 여인과 아기를 통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이 전쟁이 끝나도, 살아 돌아가더라도, 자신을 반겨줄 가족이 없어졌을까 두려웠던 그에게 지금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마주하고 싶은 가족일 것이다. 그 먼 길을 오는 동안 대부분의 일들을 두 번 가까이 경험해 왔지만, 아직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를 만나는 것만큼은 거울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 영화가 보여준 '의지'의 표현은 그 장면 자체로도 감동을 줬다. 누군가가 앞으로 뛰어갈 때, 자신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더라도 보다 더 옳은 선택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걸 보여줬다. 비록 스코필드는 자신의 생존이 걱정되었고, 자신의 눈앞에서 소중한 걸 잃었으며,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아 힘겨워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위기에서 늘 도움을 받았다. 아무리 힘겨워 이 상황을 벗어나려 해도 그 속에는 도움을 주는 이들이 있어줬다. 스코필드는 그 도움에 힘입어 자신의 의지로 위협을 무릅쓰며 참호 위로 올라가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적을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을 지나쳐 자신의 목표를 향해 넘어져도 일어서 다시 달려 나갔다. 스코필드의 의지는 생존을 위한 의지였으며, 그 의지를 이어가게 해 준 이들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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