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면 의도적으로 제목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선입관을 배제하고 보기 위해서다. 그렇게 한 참을 멍하니 바라본 후 마음에 어떤 생각이 찾아들면 그때 제목을 본다.
가끔은 뜨악할 때가 있다. 바로 이 그림이 그런 경우다. 이 그림의 제목은 '옛날'이다. 내가 뜨악한 것은 나의 생각과 제목의 괴리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평론가들의 설명 때문이다. 평론가들의 설명은 대체로 일치한다. 고대에 큰 홍수로 인해 범람한 물巛이 태양日을 덮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라고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아의 대홍수를 떠올릴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실로 전제해도 노아의 대홍수, 아니 황하강의 범람이 옛날이라는 시간을 대표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관련된 글자들에서는 눈 닦고 찾아봐도 대홍수와의 연관성은 발견할 수 없다. 옛 석昔이 들어간 글자들을 보자.
서로 애틋하게 이별함을 뜻하는 석별昔別,
돈을 빌리거나 꾸어 씀을 뜻하는 차용借用
벌어지는 사태를 잘 살펴서 필요한 대책을 세우고 행함을 의미하는 조치措置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함을 뜻하는 착각錯覺
이 글자들 속에서 대홍수가 보이는가. 내 눈에는 대홍수는커녕 엎질러진 물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내가 즐겨하는 한자 놀이가 있다.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키워드를 정해 관련된 글자나 단어에 적용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키워드가 '흐르는 강물처럼'이다. 이 키워드를 적용하면, 이 글자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두 개의 한자를 대표로 세울 수 있다.
기존 해석을 대표하는 한자는 재앙 재災이다. 후자는 돌 순巡이다.
재앙 재災에서 내 천巛은 강의 범람을 뜻하고, 돌 순巡에서 내 천巛은 흐르는 강물처럼 순행辶한다는 뜻이다. 순행은 산기슭 작은 옹달샘에서 발원한 물이 강으로 흘러 큰 바다를 이루었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비가 되어 내리는 일련의 주기적 순환을 뜻한다.
이제 이 두 글자에 석昔의 구성요소인 날 일日을 더해보자.
전자는 '재앙災의 날日'이 되고, 후자는 '흐르는 강물처럼巡 흘러간 날日'이 된다.
옛날을 뜻하는데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사실 대홍수를 뜻한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홍수의 원래의미는 '흐르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홍수를 히브리어로 마불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흐르다, 이동하다, 달려가다'를 뜻하는 야발에서 유래되었다. 이를 보듯이 옛 석昔의 원래의미는 '강물처럼 흐르다'이다.
흔히 시간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시시각각 장면 전환을 하기 때문이다. 동녘에서 서녘으로 항구히恒 운행하는 해를 볼 수 없다면 하루를 인식할 수 없고,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해가는 달의 주기적 순환亙을 볼 수 없다면 한 달을 인식할 수 없고, 사계절의 변화를 볼 수 없다면 한 해를 인식할 수 없다.
시간은 따뜻한 봄날 나비의 날개를 타고 와서 새싹에 앉았다가마지막 남은 잎사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후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에 떠밀려 잎사귀와 함께 강으로 떨어진다.차가운 얼음 속에서 겨우내 잠들었다가 개구리의 울음소리에 잠을 깨어 다시 강을 타고 흐른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태초라는 옹달샘에서 발원하여 강속에 서있는 현재의 나를 거쳐 미래로 흘려간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왕래하지만 나는 항상 지금 현재에만 존재한다. 다만 시간이 나를 매 순간 방문했었다는 사실은 내 이마 위에 흐르고 있는巛 시간의 흔적만이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시간에 대한 석昔의 통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