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생 사업가의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퇴장
아버지는 1940년 12월 생이다. 12월이 음력이니 정확하게는 41년 1월, 용띠이시다.
만 82세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의 그늘을 탈출해서 부산에서 시작한 젊은 날의 1960년대는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기였었고, 흙수저였던 아버지는 작은 회사에서 일을 배우다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편직 기계 다루는 것을 배웠고 이 일은 훗날 사업의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기술 배우는 것은 급여을 더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셨지, 사업을 해야하겠다는 목표가 처음 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손재주 있는 아내를 만나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베를 짜고, 옷을 깁는... 요즘 말로 편직을 하고 봉제를 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때가 68년 무렵...
55년이란 긴 사업의 여정을 이제 마치시게 되었다. 그 중 30년을 나도 같이 했다.
그 긴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한다.
1970년대
메리야쓰를 만들었다. 자기 상표를 만들어서 백색 메리야스를 만들어 시장에다 내다 팔았다.
다이마루라고 불리는 환편기 몇대와 미싱 몇대를 놓고 주야로 편직과 봉제를 하면서, 자전거에 제품을 싣고 국제시장, 부산진시장 메리야스 도소매 하는 가게에 물건을 대주는 것이었다.
좋은 편직 기술과 좋은 봉제 기술이 만난 사업이라 다른 회사의 제품보다 품질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성실함과 약속을 지키는 신용이 쌓이면서 사업은 안정적인 괘도에 오르게 된다.
부족한 자본으로 시작한 사업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을 혹사시키는 방식이었다.
70년대의 고생은 어머니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980년대
70년대말을 거치면서 한국 메리야스 업계에 변화가 나타난다. 메리야스 빅3가 등장하고 메리야스에도 브랜드의 바람이 불게 된다. 그로 인해 소비자들이 작은 규모의 상표를 가진 메리야스보다 백양, 태창, 쌍방울이라는 옷들을 찾게 되면서 지방의 나름 인지도 있던 상표의 제품도 차츰 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할 무렵, 서울에서 찾아온 낯선 유아복 유통회사의 제안으로 유아복으로의 업종전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유아복 제조의 시작은 아버지 사업의 시즌2가 되었다.
80년대 시즌2 유아복 제조업의 성과는 70년대 시즌1 메리야스 제조업보다 훌륭했다. 80년대 사업의 성장은 아버지에게 사업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준 시기이기도 했다.
1990년대
88년 올림픽이 끝나고 한국의 경제 성장은 아버지 사업의 돛에 순풍의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유아복 시장에서 유아용 원단으로 최고의 업체로 인정 받게 되었고, 탄력을 받은 사업은 과감한 생산 설비 투자로 규모를 키웠고, 그렇게 키운 규모는 파트너 회사였던 유아복 1등 브랜드 회사의 성장을 가속화 시키고 그와 함께 아버지의 회사도 성장하게 된다. 그야 말로 시너지를 내던 시절이었다. 97년 IMF 직전까지는 그랬다.
IMF는 회사에 큰 시련이 되기도 했지만, 이후 높아진 환율로 내수시장을 타겟으로한 제품만이 아닌 해외수출 제품까지 생산하게 되면서 규모에서는 더 늘어났지만 이익은 감익되기 시작하는 변곡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대
성장의 한계가 오기 시작한 국내 의류제조의 상황을 절감하고 90년대 중반부터 직간접적으로 시도했던 중국 생산에 뛰어들게 된다. 2000년대 초반 작은 규모로 시작했던 투자는 2006년까지 규모를 키워 2007년 중국 진출이 안착하게 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는 사업에 많은 영향을 가져왔고, 막 성장해 가던 중국 생산 사업에 큰 걸림돌이 된다.
전세계의 금융리스크가 금융기관의 대출 회수 압박으로 이어지고,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이미 받아둔 오더에 대한 환율손실과 이어지는 환율문제로 인한 해외생산 감소, 대체재로 떠오른 개성공단은 중국 생산에 큰 위협이 되었다. 다만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했던 중동 유아복 수출이 자리를 잡아가던 것이 위안이었다.
2010년대
2008년 금융위기와 중국베이징 올림픽을 거치면서 중국은 연간 20%씩 최저임금을 올려서 5년간 임금을 두배로 만들게 된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한국 의류생산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 베트남 인도네시아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2011년 면화가격의 폭등으로 사업은 난항을 겪게 된다.
그러나 2014년까지 이어진 유가 100불 이상의 시기를 겪으면서 중동 시장의 규모 확대는 사업에 큰 도움이 되어 2008년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에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2010년대 초 우연히 찾아온 자동차 시트 재료에 들어가는 원단을 제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중국 자동차 산업의 성장을 함께 하면서 미국 금융위기 이후 고전하던 중국 사업은 성공적인 안착을 이루어 내게 된다.
이 기간이 아버지 사업의 시즌3인 셈이다.
2020년 이후...
사드 이후에 한국자동차 브랜드의 중국내 판매 급격한 감소하기 시작했다. 2010년 댜오위다오(센가쿠열도) 분쟁으로 시작된 중일갈등이 한국자동차의 중국내 성장을 도왔고, 2016년 사드문제는 한국자동차 성장을 해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내 한국차의 실패는 사드가 기폭제였지 문제의 본질은 아니었다. 시장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게 정확한 실패의 원인이었다.
늘 그렇듯 시작할 때는 영원할 것 같았지만, 2019년 말 우리는 자동차용 원단 사업의 중단을 결정했다.
본인의 역점 사업이라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많이 아쉬어 하셨고, 코로나 이후 생산설비를 한국으로 가져와서 국내에서 좀 더 사업을 이어 가시려고 시도 하셨으나 어려운 국내 상황으로 최근 그 시도마저 마무리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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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난 55년간의 사업의 연혁들을 정리해 보니 참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자본으로 시작하게 된 사업은 채무상환에 대한 압박, 불확실한 외상매출의 회수, 알 수 없는 미래의 매출상황 등으로 인해 늘 불안함과 긴장감을 유발하게 된다.
많은 인원을 고용해서 불안정적인 주문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일은 그 불안과 긴장감을 증폭 시킨다.
50년 넘게 그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긴장과 불안의 일을 그만 두는 일조차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영원히 사업가로 살아가는 게 꿈이자 목표이셨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계속 일하는 것이 당신의 꿈이셨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은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숙제를 받으셔서 당혹스러워 하고 계시다.
아버지 당신의 너무 강한 자신감의 반작용이 아버지를 힘들게 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어떤 위로도 어떤 말도 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차분히 지난 50여년을 돌아보며 마음의 평안을 가지시길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마지막 시도가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체 사업의 평가가 바뀌는것은 아니다.
업계에서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이 부부의 50년 공동사업은 이제 쓸쓸한 듯 막을 내리지만, 두 부부의 여정을 아는 이들은 두 부부가 자기의 일에 얼마나 헌신적이었으며,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성과를 내기도 했고, 또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낸 모습들은 주변에 많은 귀감을 만들어 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에 사업을 같이하셨던 많은 분들이 계신다. 업계 선배 후배... 그 모든 분을 통틀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금의 퇴장은 최고의 박수와 존경을 받을 일이다.
두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둘째 아들 올림